[역사속 경제리뷰] 가발

2022-06-27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가발은 머리카락이나 이와 유사한 것으로 머리 모양을 만들어 쓰는 것을 통칭한다.

과거에는 가발이 권위의 상징으로 여겼지만 현대에 들어서면서 미용의 목적으로 가발을 사용하게 됐다.

가발은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한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부녀자들이 머리카락을 판매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서구유럽에서는 권위의 상징으로

서구유럽에서는 가발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대다수 사람들이 머리를 밀고 가발을 썼다.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나 ‘벼룩’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신관들만 머리를 밀고 가발을 쓰지 않았다.

가발도 신분에 따라 달랐다. 100% 인모 가발은 귀족들이 주로 썼고, 평민들은 양털이나 식물 섬유 등을 사용했다. 그 이유는 100% 인모 가발은 비쌌기 때문이다.

유럽 사회에서는 귀족, 장군, 고위 공무원들은 공식석상에서 가발을 사용했다. 이를 ‘퍼루크’라고 부른다. 초상화들을 보면 풍성한 가발을 착용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같은 유행을 하게 된 것은 프랑스 루이 14세 때문이라는 속설이 있다.

풍성하고 아름다운 가발을 루이 14세가 착용하자 전유럽에서 대유행이 일어나면서 ‘보다 풍성하게’가 유행이 됐다. 문제는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가발 도둑’이 극성했다고 한다.

군인들은 흰가발을 착용했고, 해군들도 착용했는데 흰가발을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밀가루를 사용해야 했다. 밀가루와 머릿기름이 만나면서 오묘한 상황이 됐고, 그것을 쥐가 파먹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면서 해군들 사이에서는 전염병이 발생하기도 했다.

영국의 판사와 변호사들 역시 가발은 자존심과 같았다. 이런 이유로 어떤 판사 혹은 어떤 변호사가 얼마나 비싼 가발을 착용하느냐를 두고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가발의 역사

삼국사기에는 251년 고구려 중천왕의 왕비에 관한 일화가 등장한다. 당시 머리털이 8척이나 되는 장발 미녀가 왕의 총애를 받자 왕비는 이를 질투해서 이웃한 위나라에게 엄청난 보물을 내걸고 장발을 구한다고 하니 우리가 사신을 시켜 장발미녀를 보낸다면 위나라가 이를 반기어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장발을 구한다는 것은 가발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723년 신라 33대 성덕왕은 당나라에 인삼, 우황, 과하마, 금, 은, 조하주 등과 함께 미체를 보냈다고 돼있다. 미체는 가발을 말한다. 그런데 가발을 보낸 흔적은 계속 나온다. 662년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평양성 주변에 머물던 당나라 소정방 군대에게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군량을 원조하면서 머리털 30량을 보냈다는 기록이 돼있고, 730년에도 당나라에 머리털 80냥을 보냈고, 734년에는 머리털 100냥을 보냈다. 머리털은 수탈의 역사가 된 것이다.

명성황후

가체와 함께한 조선시대

가체는 여성을 치장하기 위해 머리 위에 올리는 가발인데 삼국시대부터 있어왔다. 고려 때는 가체의 치장이 너무 심해서 그에 대한 비판 여론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가체가 문제가 된 것은 조선시대 때이다. 가체의 사치가 심해지면서 조선 성종 때는 30cm가 됐다.

그리고 조선 후기 들어오면서 가체 가격이 치솟으면서 최고 비싼 가체는 800냥 정도 됐는데 기와집 2~3채 값이었다. 현대로 치면 수십억원에 달했던 것이다.

그리고 가체로 인해 어린 여성이 죽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목뼈가 부러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요즘 어느 한 부자집 며느리가 나이 13세에 다리(가체)를 얼마나 높고 무겁게 하였던지,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 갑자기 일어서다가 다리에 눌려서 목뼈가 부러졌다.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으니, 아, 슬프도다!”라고 기록돼 있다.

결국 1756년 영조는 가체 금지령을 내리고 쪽머리와 족두리를 권장했다. 하지만 가체의 유행을 막을 길이 없어서 결국 다시 허용해야 했다.

오늘날 사극에서 여배우들이 가체를 얹고 연기를 할 때 목디스크로 고통을 겪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가체는 ‘남자 머리카락’으로 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성은 가체를 올려야 하기 때문에 남성 머리카락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성 머리카락을 사용했던 또 다른 이유는 상투 때문이다. 상투를 틀기 위해서는 머리 꼭대기에 있는 머리카락을 잘라내야 했다. 그것을 ‘속알머리’라고 했다. 오늘날 ‘소갈머리 없다’고 할 때도 이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그 속알머리를 잘라서 가체를 만든 것이다.

YH여공

우리나라 수출 효자 상품 그리고 뽀글머리

1960~70년대 수출 효자 상품은 가발이었다. 1962년 첫 가발수출을 시작으로 가발 수출은 우리나라의 외화벌이를 하게 해준 상품이다.

적게는 5만 가닥에서 많게는 30만 가닥의 머리카락을 일일이 손으로 심어야 하는 노동집약형 산업이었고, 1972년 미국 수출 제1위가 가발이었다.

신민당 점거 사태를 일으킨 YH 여공 사건의 당사자인 YH무역도 가발 수출을 통해 대기업이 됐다.

당시 100% 인모이기 때문에 사람의 머리카락을 직접 구해야 했다. 당시 여성들은 우리나라 수출을 위해 자발적으로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다.

그러다보니 일부 미용실에서는 파마를 서비스로 해줬다. 중년 여성들 중 이른바 ‘뽀글머리’가 많은 것도 가발 수출과 연관돼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난을 탈피하기 위해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내다 팔았고, 그 머리카락을 갖고 가발을 만들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부터 인건비가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사양산업이 됐다. 하지만 현재 모발산업은 전세계 시장의 80%를 차지하는 산업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