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7월 4일 미국 독립선언하다

2023-07-04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776년 7월 4일 미국이 독립선언을 한 날이다. 영국과 북미 식미지 사이에서의 관계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영국은 당초 자치령과 유사한 개념으로 북미 식미지를 대했다. 하지만 잦은 전쟁으로 인해 국고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모진 조세를 부과하기 시작했고, 이에 북미 식민지들의 상인들이 고통을 받기에 이르렀다.

개척 이후 영국과 잘 지내던 북미 식민지

이른바 제임스타운이나 메이플라워호의 청교도 등을 통해 건설된 북미 식민지는 영국 본토와 상당히 사이가 좋았다. 영국 본토는 북미에 식민지 총독을 임명했지만 총독들은 본국 출신보다는 북미 식민지 태생의 이민 2세대 혹은 3세대 인물로 했다. 그리고 각 식민지들 역시 영국과 국왕에 충성한다는 조건으로 의회와 주 정부를 구성하면서 자치권을 누렸다. 하지만 영국이 네덜란드와 해양에서 패권을 다투는 상황이 되면서 국고가 빠르게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그에 따른 규제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항해법이다. 항해법은 네덜린드로부터 식민지 무역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만든 법안인데 오로지 영국 혹은 식민지 배만 영국 식민지로 상품을 옮길 수 있게 하고, 영국인 선원들이 절반 이상 포함돼야 하며, 담배, 설탕, 직물은 오직 영국에만 팔 수 있고, 식민지로 향하는 모든 상품은 영국을 거쳐야 하며 수입관세를 내야 했다. 그러다보니 북미 식민지 상인들의 불만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인들만 불만이 있었을 뿐 대규모 농사를 했던 남부지역 식민지 사람들은 크게 독립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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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디언 전쟁 이후

그러다가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일어났고, 북미 식민지와 영국 본토는 프랑스에 맞서 일치단결해 승리를 거뒀다. 북미 식민지가 영국 본토를 도왔던 이유는 북미 식민지 사람들이 영국 의회로 진출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과도한 세금 부과였다. 왜냐하면 해당 전쟁에 영국이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이에 영국외회는 1764년 설탕조례를 제정했고, 1765년 인지조레를 통과시켰다. 인지조례는 식민지에 유통되는 모든 인쇄된 종이에 3페니의 인지를 부과한다는 것이다. 북미 식민지 사람들로는 자신들이 얼마나 공헌했는데 돌아오는 보답이 이주제한 혹은 증세된 세금이었다는 것에 반발했다. 특히 인지조례는 사람마다 부과하는 조례이기 때문에 북미 식민지 전역에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해양법까지만 해도 북미 식민지 상인들의 문제였다면 인지조례는 북미 식민지 사람들 모두의 문제가 된 것이다.

오히려 세금 더 부과

그러자 식민지 사람들이 시위에 나섰고, 그 소식을 들은 영국 의회는 자존심 문제라면서 세금을 더 부과하기에 이르렀다. 즉, 1770년 타운센드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온갖 품목에 온갖 명분을 붙여서 세금을 부과한 것이다. 그러자 북미 식민지에서 강하게 반발하면서 결국 법안은 폐기됐지만 홍차에 부과된 세금은 폐기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당시 북미 식민지 GDP는 대영제국 전체 GDP의 절반을 차지했고, 1772년 대영제국 본국의 GDP와 13개 북미 식민지 GDP가 엇비슷했다. 이는 북미 식민지로서는 영국에 굳이 예속될 이유가 있냐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가운데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했다. 보스턴 차 사건은 영국 본토를 자극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군대를 파병했다. 이에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는 식민지 폐지 및 영국 정부의 직할 통치 선언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영국 본토가 단행했다. 그러자 북미 식민지는 1774년부터 대륙회의를 두 차례 소집했다. 원래 계획은 영국과의 충돌을 피하자는 차원의 소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미 식민지에는 군대가 없었다. 왜냐하면 영국이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 본토에 맞서 대항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물론 원주민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내 고향은 내가 지킨다는 민병대가 있었기 했지만 ‘군인’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당초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도 반역에 대한 목소리를 입에도 내지도 않았다.

매사추세츠부터 독립전쟁 시작

독립전쟁은 앞서 보스턴 차 사건으로 인해 영국이 군대를 보내면서 시작했다. 그리고 보스턴이 포함된 매사추세츠를 주 자치령 폐기하고 직할로 하겠다고 영국 본토가 선언하면서 보스톤을 중심으로 민병대가 결성하기 시작했다. 영국 본토와 각계 각층에서 모여든 민병대 사이에서 지난한 전투가 전개되면서 대륙회의에서도 영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1776년 1월 토머스 페인이 ‘상식’이라는 책이 발간됐고,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독립 여론이 활발하게 불타올랐다. 이에 대륙회의는 격렬한 논의 끝에 1776년 7월 2일 독립선언문을 작성했고, 7월 4일 발표하면서 마침내 13개 식민지는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화력면에서는 영국이 우위를 차지했다. 누구도 북미 식민지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변수가 발생했다. 바로 프랑스가 참전을 한 것이다. 프랑스가 참전을 하면서 영국은 프랑스군을 몰아내야 하면서 북미 식민지 민병대와도 싸워야 하는 이중고를 안게 됐다. 그러면서 결국 북미 식민지는 독립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오늘날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