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카레라이스

2023-07-04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커리’는 인도에서 특정 요리가 아니라 특정한 요리방법의 ‘총칭’이다. 갖은 향신료를 미리 섞어둔 마살라라는 것을 활용한 요리가 바로 ‘커리’이다. 이런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됐고, 인도에서 커리가 영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영국인들은 빵에 찍어 먹거나 스프타 스튜 형태로 커리를 만들어 먹었다. 이런 커리가 일본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카레라이스로 재탄생하게 됐다. 카레라이스는 일본에서 만든 음식이다.

육식 금한 일본인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전까지만 해도 육식을 금했다. 육식이라고 하면 살아 있는 모든 고기를 뜻하겠지만 일본에서 육식이란 땅에서 걸어다니는 동물을 의미한다. 이는 불교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략 1천여 년 이상 육식을 금하면서 치아가 약했다. 왜냐하면 씹는 힘이 약하면서 치골 자체도 약하게 되면서 치아가 함몰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면서 치열이 고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또한 육식을 금하면서 벌어진 것 중 하나가 신체가 왜소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으로 싸우다가 포로가 된 사람들 중에 누가 한국인이고 누가 일본인인지 미국 군인들은 정확히 구분했다. 그 이유는 덩치가 좀 크면 한국 사람이고, 덩치가 좀 왜소하면 일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왜소한 체격이 나타난 것은 오랫동안 육식을 금했기 때문이라면서 고기 먹기를 권장했지만 이미 약해진 치아로 고기를 뜯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이에 나타난 것이 돈가스나 커틀릿이었다. 카레라이스도 이 시기에 만들어진 음식이지만 일본 해군과도 연결된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서는 영국 해군으로 많은 유학생들 파견했다. 그것은 당시 세계 최고의 해군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해군 의무총감이었던 다카키 가네히로는 서양 의학을 배우기 위해 영국에 유학 중이었는데 영국 해군의 급식인 카레 스튜를 맛보았다. 당시 다카키는 일본 해군을 괴롭혔던 각기병에 대해서 치료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에 식단 개선을 위해 고민하던 중 영국 해군 식단이었던 커리를 일본 해군에 도입시킨 것이다. 영국식 커리 수프와 일본식 덮밥을 결합해서 일본화 시킨 것이 카레라이스다. 당시 일본 육군은 각기병을 없애기 위해 쌀밥을 현미밥으로 변경했지만 군인들은 “우리가 잡곡밥 먹으려고 군대 왔냐”라면서 집단 반발했고, 결국 쌀밥을 지급했는데 각기병 환자가 발생했다. 이에 해군은 카레라이스를 보급했는데 여기에 오랜 육식 금지 문화를 없애기 위해 잘게 썬 고기를 넣었다. 카레라이스는 특유의 향 때문에 오랫동안 바다 위에서 생활을 해도 선원들은 별탈 없이 먹을 수 있었고, 퇴역한 후에는 민간에게로 전파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0녀대 고형 카레가 등장했고, 1968년 3분 즉석 식품 카레가 되면서 일본에서는 대중적인 음식이 됐다. 일본에서 카레라이스의 존재는 우리나라에서는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정도 급으로 취급할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일본 통해 들어온 카레라이스

우리나라에서 카레라이스는 물론 일본식 카레라이스가 전파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레라이스하면 떠오르는 것이 ‘일본’이 아니라 ‘인도’이다. 우리나라에게 ‘인도’란 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에는 그냥 낯선 여행지와 같은 존재였다. 여행을 가지 못하는 서민들은 카레라이스를 먹으면서 인도를 가는 착각을 하게 했다. 그러다가 여행자유화 이후 인도에서 커리를 맛본 사람들은 ‘카레라이스’와 ‘커리’가 완전히 다른 음식이라는 것을 깨닫고 실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카레라이스가 거의 주식이 돼다시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카레라이스는 짜장밥 등과 함께 어쩌다가 먹는 음식 정도로 취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시되면서 집에서 밥을 해먹는 사람들이 증가했고, 그에 따라 즉석 카레 시장도 상당히 성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