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훈 칼럼] 막이 오른 우크라이나 언어 사냥
2023-07-06 백병훈
언어말살로 우크라이나 지우기
며칠 전 한국의 언론사 특파원(신은별)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탄막을 뚫고 현지에 들어갔다. 그리고 러시아가 언어의 말살을 통한‘우크라이나 지우기’를 자행하고 있다고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러시아에 의한 우크라이나 언어의 말살작업이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민족, 인종 집단학살 의미인 제노사이드(genocide)처럼 언어(language)와 살해(cide)의 합성어‘랭귀사이드’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7월 1일 푸틴 대통령은 서방이 우크라이나인을 지정학적 게임의 소모성 재료로 사용한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사태는‘미국식 신식민주의의 개정판’이라고 일갈했다. 자유주의의 한계점에 달한 서방이 새로운 출로를 찾아 떠난 길이 우크라이나를 이용한 러시아 포위전략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서도 인류를 하나로 묶는 건 다극체제라고 덧붙였다. 푸틴의 주장은 국제사회의 탈양극체제와 다양성을 인정해야만 성립되는 논리다. 더구나 인류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각 민족, 종족, 국가의 존재가 인정돼야 한다. 그러므로 푸틴이 말한 다극체제, 다양성 발언은 이율배반적이고 위선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언어말살을 통한‘우크라이나 지우기’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군사작전과 더불어 언어고사 정책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민족 정체성을 고갈시켜 버리겠다는 크렘닌의 고도의 정치심리학적 행위이다. 한마디로 민족말살 정책이며 우크라이나 민족혼의 타살이다.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
언어는 민족정신을 관류하는 마르지 않는 거대한 저수지의 물이다. 그러므로 민족언어는 민족 정체성을 상징했고, 이 때문에 소수민족이나 피지배민족을 동화시키려는 강력한 수단이 민족언어 정책이었다. 이미 1720년 러시아제국 표토르 1세는 우크라이나 언어를 말살하라는 법령을 선포하였고 이후 200년이 넘게 민족말살 정책은 지속되었다. 러시아적 다민족국가에서 러시아제국 시절은 물론 볼쉐비키혁명의 민족이론과 민족정책도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러시아혁명의 전야에 레닌과 스탈린은 약소민족국가에서의 민족자결권이 아니라 각 민족 내의 프롤레타리아의 자결을 통한 혁명적 정당과 민족국가를 원했다. 그리하여 소비에트국가 건설을 위한 전술 차원에서의 언어공동체를 민족국가 형성의 주요 조건으로 간주했다. 이런 이유로 모스크바를 대적하는 분리주의운동이나 독자성은 허용 될 수 없었고 참담한 응징으로 갚아줬다. 혁명의 그 날, 레닌이 약속했던 우크라이나 주권은 지켜지지 않았고, 스탈린은 가혹하게 우크라이나의 민족성을 탄압하였다.그래서일까?
특파원이 만난 우크라이나 관계자는 “언어는 국가의 DNA나 다름없다”고 의미있는 말을 던졌다. 언어말살은 국가안보와 직결된다고 본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언어 죽이기는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의 주된 목표라고까지 했다. 광고와 표지판의 변경, 점령지역 교육과정의 러시아어 진행, 우크라이나 도서를 소장한 도서관 파괴, 학교문헌 몰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관계 도서 파기, 우크라이나 현대사 지우기,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화홍보 행사개최, 러시아 TV채널로의 변경이 이를 증명한다고 했다. 사실, 러시아어를 많이 사용하는 돈바스 동부지역은 불과 100년 전에는 우크라이나어가 주된 언어였다. 1989년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어가 국어로 선정돼 러시어가 공용어로 격하됐다. 이처럼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어는 소수민족어로 분류되었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언어의 소실 양상은 수백년 넘게 이어져온 민족말살 정책의 결과였음은 물론이다. 인류역사상 우크라이나어처럼 365년 동안 러시아제국에 의해 탄압받고 유린된 언어는 없었다. 언어에 대한 말살은 국가나 민족의 정신을 형해화하고 민족정체성을 파괴시킨다. 그래서 언어 파괴는 인간 파괴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최소한의 저항선을 따라 움직인다고 볼 때, 어디에서든지 민족혼 말살 시도는 늘 저항과 전쟁을 불러온다. 이제 푸틴에 의해 우크라이나 언어에 대한 사냥이 다시 시작됐다. 또다른 모습의 홀로코스트이다. 여기서 악의 행진을 멈추게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파스칼(Blaise Pascal)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는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그것이다.백병훈 약력
건국대학교 비교정치학 박사 국가연구원 원장 한국정치심리공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