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7월 8일 한산도대첩

2023-07-08     어기선 기자
사진=KBS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592년 7월 8일(음력)은 이순신 장군이 견내량에서 견내량대첩으로 알려진 한산도대첩을 이뤄낸 날이다. 한산도 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이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인해 평양까지 진격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추가 보급 및 병력 지원이 없어서 더 이상 나가지 못하게 됐고, 임진왜란은 장기전으로 고착화됐다. 일본은 제해권이 부산으로 좁아지게 됐고, 조선 수군은 부산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다닐 수 있게 된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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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전투에서 승리한 와키자카 야스하루

전라좌수사 이순신 함대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본 함대를 일방적으로 토벌을 하면서 승리를 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급해졌고, 이에 용인 전투에서 승리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부산으로 급파했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수군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구키 요시타카와 그 외 가토 요시아키 등 3인을 소집해 군대를 규합해 조선 수군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용인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순신 함대를 낮게 평가했다. 이런 이유로 단독 행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적선 70여척이 영등포(경남)에서 견내량으로 옮겨 정박했고, 8일 적을 유인해 한산 앞바다로 끌어냈다. 그리고 학익진을 펼쳐 일시에 진격해서 크고 작은 총통들로 연속해서 연사해서 왜군을 무찌르니 이것이 한산도 대첩이다. 이때 와키자카는 무인도에 상륙해서 미역을 따먹고 지냈다고 해서 와키자카 후손들은 이날을 ‘미역 먹는 날’로 기념하고 있다. 이후 10일 안골포에서 적선 40여척을 불살라 버리니 한산도대첩의 후속인 안골포 해전이다.
사진=KBS

제해권 장악

한산도대첩의 의미는 제해권 장악이다. 이는 단순히 제해권 장악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곡창지대를 사수했다는 의미다. 현재도 그러하지만 그 당시에도 전라도는 곡창지대이다. 전라도에서 산출한 쌀이 전국 팔도로 퍼져나가서 의병들이나 조선군의 식량이 되기도 한다. 이는 조운제도와 연결되면서 임진왜란 당시 식량을 조달하는 원동력이 됐다. 당시 육지는 왜군이 장악했기 때문에 전라도 쌀을 운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운선’ 밖에 없었다. 평양 이북에 있는 조선군이나 명나라 군대에게 밥을 먹여야 하는데 평안도 지역에서 산출되는 쌀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전라도에서 산출되는 쌀을 운반해야 하는데 육로를 이용하면 왜군들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해권을 장악한 조선 수군이었기 때문에 해로를 통해 조선군과 명나라 군대에게 밥을 먹일 수 있었다. 실제로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내내 조정에 쌀을 진상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의 글을 난중일기에 남기기도 했다.

일본은 식량 확보 실패

반면 일본은 식량 확보에 실패를 하게 된다. 전라도 지역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물론 해로를 통해 쌀 보급을 하지 못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성에서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하게 됐다.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는 다음해 평양성을 빼앗길 때까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추위와 싸워야 했다고 전해진다. 평양성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지만 보급로를 확보하지 못하면서 육로로도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육로는 ‘의병’들에 의해 막혀버리고, 바다는 이순신 함대가 막아버리면서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는 평양성에서 세월만 보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