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문화대혁명

2023-07-08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성상납 증거인멸교사 의혹으로 국민의힘 중앙윤리위원회로부터 이준석 대표가 당원권 6개월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 대표는 8일 자신의 SNS를 통해 “국민의힘의 당원이 되는 빠르고 쉬운 길. 온라인 당원가입”이라며 “한달에 당비 1000원 납부약정하면 3개월 뒤 책임당원이 되어 국민의힘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 3분이면 된다”면서 당원 가입을 독려했다. 현재 온라인 상에서는 윤리위의 결정에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2030 보수 청년층이 많은 ‘FM코리아’(펨코)에서는 토사구팽이라면서 당원 가입 인증 글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다. 이로 인해 국민의힘은 사실상 내전에 들어간 분위기다. 마오쩌둥이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문화대혁명으로 극복한 것과 대비된다.

정치적 위기에 몰린 마오쩌둥, 결국 사퇴

1960년대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공업화해서 미국을 따라잡겠다면서 대약진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부정부패, 비효율적 행정, 현실감각 등으로 인해 대참사로 끝났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제사해 운동이다. 사해란 참새, 쥐, 모기, 파리 등을 의미한다. 마오쩌둥이 농촌을 지나가다가 마침 참새가 보였고, 이에 참새는 해로운 새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참새 박멸 운동이 벌어졌다. 참새의 개체수가 급감하면서 3천만명의 아사자가 나왔다. 즉, 굶어죽은 것이다. 이에 사해 즉 4가지 해로운 동물이 참새에서 바퀴벌레로 바뀌었다. 이같이 현실적인 감각이 완전히 떨어진 마오쩌둥의 지휘로 대약진 운동은 대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아사자를 만든 것 뿐만 아니라 수백만명을 대약진 운동에 비협조했다는 이유로 반동으로 몰아 숙청했다. 이에 중국 공산당 간부들은 마오쩌둥에 참사 책임을 질 것을 요구했다. 많은 공산당 간부들이 돌아서면서 결국 마오쩌둥은 사퇴하고,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이 수습에 나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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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제 폐해도 드러나

마오쩌둥은 물러날 생각이 없으면서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마침 관료제에 대한 폐해가 드러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관료제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관료제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서 공산당에 대한 비판과 탈당, 그리고 홍콩으로의 망명이 쇄도했다. 그러자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이라면서 학생세력을 마구 때려잡았다. 이때 마오쩌둥은 “부르주아와 자본주의 세력들이 다시 사회로 침투하고 있는데, 이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청년들이 바로잡아야 한다”는 연설을 하게 됐다. 이에 학생세력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표적으로 삼아 공격을 하고, 마오쩌둥을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홍위병이 탄생한 것이다. 자발적으로 생겨난 홍위병은 점차 이슬람 근본주의와 같이 과격화됐다. 마오쩌둥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마오쩌둥 개인의 리더십 때문이 아니라 관료제 때문이라고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홍위병들은 교수, 예술가, 학자 등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을 길거리로 끌어내 공개처벌 내렸다. 두들겨 패서는 강제노동 수용소에 보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홍위병의 과도한 행동에 마오쩌둥도 “무투 말고 문투를 하라”고 했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심지어 신호등의 빨간 등은 정지신호가 아니라 혁명을 상징하는 적신호이기 때문에 멈춤 신호가 아니라 전진 신호라고 바꾸려고 했다. 자동차 우측통행은 미 제국주의의 유산이라고 바꾸려고 했다. 꽃집이나 화훼농가는 노동력을 낭비한다는 이유로 습격하고, 애완동물도 반동이라는 이유로 닥치는대로 압수했다. 고양이는 부르주아들의 짐승이라면서 집단학살 됐고, 비둘기는 사람이 먹을 곡물을 먹는 짐승이라고 학살됐다. 문화유산 파괴도 있었는데 오늘날 중국이 자신의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지 못하고 동북공정 등을 펼치는 이유 중 하나가 문화대혁명 당시 문화재가 많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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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다시 권력 잡다

결국 덩샤오핑 등을 비롯한 지도부가 권력에 물어나고 마오쩌둥이 권력을 잡았다. 류사오치는 홍위병에게 잡혀가 처참하게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죽었고, 덩샤오핑은 죽지 않을만큼 맞고 집단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했고, 그의 아들 덩푸팡은 고문에 못이겨서 투신자살을 시도했으나, 죽지 않고 평생 하반신 불구로 살게 된다. 마오쩌둥이 권력을 잡은 후에도 홍위병을 통제할 수 없었다. 홍위병들끼리도 파벌과 반목으로 싸움질을 하게 됐고다. 마오쩌둥은 1968년 7월 28일 홍위병 지도자를 불러 문화대혁명을 중지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69년까지 상산하향 운동을 진행했다. 이는 젊은 학생들은 농민에게 배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학생들을 농촌으로 추방한 것이다. 시골에 가게 되면 도시 거주권이 박탈되고 죽을 때까지 살아야 했다. 수백만 홍위병이 시골로 끌려갔는데 온갖 고초를 겪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에서 고학력자가 사라지게 됐다. 이후 덩샤오핑이 다시 복귀하면서 사회가 건전하게 돌아갔지만 홍위병에 의한 문화대혁명은 지금도 그 영향을 주고 있다. 중국이 이민족들의 침범에도 지켜왔던 문화와 전통을 일순간에 파괴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가져온 영향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의 중국이다. 문화대혁명 이전에는 각 지역에 군벌들이 있었는데 군벌주의를 청산하고 중국공산당 하의 단일정부를 성공적으로 출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