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7월 11일 명나라 정화 선단, 첫 항해 떠나다
2023-07-11 어기선 기자
기록 남아 있지 않아
정화가 대원정을 떠난 이유에 대해 명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선박의 크기 역시 남아있지 않다. 중국 사람들의 특유의 과장된 표현을 감안하면 과연 정화의 대원정 선박의 크기가 거대했고, 많은 선박들을 거느렸느냐에 대해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보선의 크기가 길이 150m, 폭 60m로 돼있는데 과연 이 기록이 맞냐를 두고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또한 일각에서는 아메리카에 서양사람들보다 일찍 도달했다고 돼있지만 이 역시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엇보다 정화의 대원정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과연 그의 원정대가 어디까지 원정으로 나섰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대원정을 떠났다는 사실과 최소한 아랍 국가들까지는 들렀다는 사실이다.정화 대원정 이후 왜 명나라는
그렇다면 정화 대원정 이후 왜 명나라는 대원정 선단을 다시 보내지 않았는지 여부다. 그것은 굳이 보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명나라가 자급자족 경제 체제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우선 당시 GDP 1위 국가는 명나라였다는 점이다. 당시 명나라 GDP는 유럽 모든 국가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즉, 굳이 해외 무역을 해서 먹고 살 필요가 없을 정도로 풍족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자급자족 경제로 빠르게 전환됐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은 북송이나 원나라 때 ‘지폐’를 사용했다. 북송 때는 교자(交子)라는 지폐를, 원나라 때는 교초(交鈔)라는 지폐를 사용했다. 이는 북송이나 원나라 때만 해도 해외 교역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고려 땅에도 교초라는 지폐가 많이 있었다. 하지만 흑사병의 창궐로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찾아오게 된다. 과도한 인플레이션은 교초라는 지폐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는 기존 귀족의 체제가 붕괴된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과도한 인플레이션은 한족으로 구성된 홍건적이라는 백련교도들이 궐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때 강남 일대를 통일하고 몽골족으로 중국 밖으로 쫓아낸 인물이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 주원장이었다. 농민을 바탕으로 한 세력이 명나라를 건국하게 됐다는 것은 농촌의 부흥과 토지 개간, 대규모 이주 등 농민들의 생활 안정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무제는 토지 측량과 인구 조사를 했다. 이는 자급자족 경제로 전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나라 때만 해도 지폐를 사용하면서 상공업에 대한 우대 정책을 해왔지만 명나라 때는 자급자족을 하면서 농업 우대 정책으로 전환했다. 이런 이유로 대명보초(大宋寶鈔)라는 지폐를 초반에 발행했지만 대명보초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경험하면서 지폐의 역할이 점차 줄어들게 됐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세금을 은으로 걷는 은본위 체제로 전환하게 됐다.자급자족 경제에서 굳이 대원정을
이처럼 빠르게 자급자족 경제가 되면서 굳이 대원정을 떠날 이유가 없었다. 정화 대원정이 왜 이뤄졌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지만 일각에서는 은본위 체제로 빠르게 전환되면서 은광을 찾아 은 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정화 대원정이 은광을 찾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에 결국 명나라는 더욱 자급자족 경제 체제로 빠르게 전환됐고, 그 이후 굳이 대원정을 할 이유가 없어서 해외 원정에 나서지 않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명나라가 빠르게 자급자족 경제 체제로 전환됐다는 것은 조선땅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명나라가 빠르게 교역 문을 닫아 걸면서 막 건국한 조선도 교역 문을 닫아 걸게 되고, 조공무역 이외에는 아예 사무역을 금하게 된다. 이것이 조선 500년 동안 내려오면서 영향을 미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