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7월 18일 당나라 군대 안시성 포위

2023-07-18     어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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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645년 7월 18일(음력)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 안시성을 포위한 날이다. 고구려-당 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두 달 동안의 치열한 전투는 결국 당나라의 패배로 끝나면서 한동안 소강상태에 빠졌지만 여당 전쟁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면서 결국 고구려가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안시성이 조그마한 성이기 때문에 당나라로서는 무시하고 평양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었지만 수나라 때 살수대첩의 악몽 때문에 안시성을 반드시 함락시켜야 했다.

보급로 확보 위해 반드시 필요

안시성은 조그마한 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당나라 군대는 안시성을 무시하고 평양성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나라 군대는 그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612년 수양제가 이끈 113만 대군이 고구려를 침범하고, 정예병 30만 별동대가 평양성을 쳐들어 갔지만 실익을 거두지 못하고 퇴각하던 도중 살수(청천강)에서 을지문덕 장군에게 참패를 당한 사건인 살수대첩 때문이다. 당나라 군대가 후방을 신경쓰지 않고 평양성으로 쳐들어간다면 안시성을 비롯한 요동 지역 성에서 당나라 군대의 보급로를 끊어버리면 식량 조달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당시 고구려는 ‘청야전술’을 사용했다. 즉, 들판의 곡식을 모두 거둬들이고 들판을 태워버리는 전술이다. 따라서 당나라 군대는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없고, 결국 후방에서 식량을 조달해야 했다. 하지만 요동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는 멀고, 또한 산악 지대이기 때문에 보급의 어려움이 있었다. 더군다나 후방인 안시성을 그대로 놔두고 평양성으로 진격할 경우 후방 보급부대를 급습하게 된다면 당나라 군대는 꼼짝 없이 굶어죽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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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포위 작전

당 태종은 고구려 정복 꿈을 꾸게 된다. 이때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집권을 하게 되자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트집 잡아 전쟁을 일으킨다. 당나라 군대는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등을 함락하면서 기세 등등했고, 결국 안시성을 목전에 두게 됐다. 안시성을 포위한 후 계속해서 공습을 시도했지만 당나라 군대는 성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자 당나라 장수 이세적이 “성을 함락시키는 날 저들을 모두 묻어버리게 해달라”고 당 태종에게 요청을 했다. 당나라 군대가 안시성에 발이 묶이게 되면서 고구려 장수들이 요동 지역 성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다. 당나라 군대로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시성을 버리고 평양성으로 곧바로 진격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당나라 군대가 토산을 쌓고 안시성을 압박하려고 했지만 고구려 군사들이 오히려 토산을 점령하면서 군사적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됐다. 결국 추위가 찾아오면서 당 태종은 안시성에서 철군을 해야 했다. 야사에는 당 태종이 이때 눈에 화살이 박혔다고 기록돼 있지만 정사에는 기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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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전략의 변화

안시성에서 당나라 군대가 철군한 것은 당나라로서는 전략의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대규모 원정을 포기한 것이다. 수나라 때부터 시작해서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대규모 원정을 했는데 자치통감에서는 당 태종은 죽으면서 고구려 원정은 하지 말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사에서는 당 태종이 죽는 날까지 고구려 원정을 준비했다고 한다. 이후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를 계속 원정했지만 그것은 전략의 수정으로 이어졌다. 고구려와 계속 전쟁을 하되 주로 소모전, 유격전 양상으로 바뀌었다. 또한 신라와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당나라는 군사를 보내고, 신라에게는 ‘식량 보급’을 요청했다. 이는 결국 자국의 경제적 소진을 최소화하는 전략이다. 고구려는 당나라 군대가 쳐들어 올때마다 ‘청야 전술’을 사용했다. 청야 전술을 사용하게 되면서 식량이 모자라게 되면서 귀족들의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는 식량을 주로 신라를 통해 조달을 하기 때문에 큰 타격은 없었다. 또한 대규모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군사들의 희생도 기존에 비하면 덜했다. 당나라는 신라의 쌀 보급이라는 우군을 만나면서 매년 고구려를 쳐들어갔고, 고구려는 그때마다 청야 전술을 사용하면서 농민들이나 귀족들은 연개소문에 대한 불만이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연개소문 사후 그 자식들의 권력 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평양성은 668년 ‘신성’이라는 사람이 문을 열어주면서 멸망을 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