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시발택시

2023-07-21     어기선 기자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정부가 심야시간 택시 승차난을 완화하기 위한 각종 해소 방안을 내놓고 있다. 탄력요금제 도입, 택스 플랫폼 등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토교통부는 다음달 중 심야시간대 택시 승차난을 해소할 수 있는 ‘플랫폼 택시 체계 개편 활성화’ 방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아울러 심야시간대 탄력요금제 도입부터 플랫폼 택시 유형별 활성화 방안까지 내놓기도 했다. 탄력요금제는 택시 공급이 부족한 오후 10시~오전 2시까지 시간대를 심야 시간대로 지정해 플랫폼 택시 요금을 탄력적으로 책정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다.

택시란

택시란 요금을 받고 손님이 원하는 곳까지 태워다 주는 영업용 승용차를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영업허가를 받고 노란색 영업용 번호판을 단 승용차 또는 승합차를 사용한다. 원래 자동차가 발명되기 전인 19세기 영국에서 핸섬 캡(Hansom Cab)이라는 특수한 형태의 마차가 있었는데, 이 마차는 탑승 인원이 일반 마차에 비해 1~2인승 정도로 적은 대신 마부가 지붕 위 뒤편에 타는 특이한 구조 때문에 무게 중심이 안정돼 다른 마차보다 속도가 빨랐다. 이 마차가 오늘날의 택시처럼 영업을 했고, 자동차가 그 자리를 찾이하면서 택시를 영어로 캡(cab)이라고 부르게 됐다. 택시란 단어는 이탈리아어의 베네치아 사투리로 ‘급하다’는 의미인 ‘딱시’에서 유래됐다. 세금이라는 뜻의 TAX와는 관계가 없다. 또한 독일의 우편을 담당했던 택시 가문과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 다만 일부 사람들은 독일 우편을 담당했던 택시 가문에서 택시 단어가 유래했다고 주장을 할 뿐이다.

우리나라 최초 택시 시발택시

우리나라 최초 택시는 시발택시이다. 6.25 전쟁 직후인 1955년 미군이 내다버린 윌리스 MB 지프들을 주워다가 완전히 해체한 후 쓸만한 부품끼리 긁어뫄서 다시 조립했다. 그러면서 자동차로 인정 받았다. 제작사는 국제차량제작 주식회사이다. 국제차량제작소는 자동차 정비업을 하고 있던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3형제가 세운 회사로 1947년에 설립되었다. 1955년 8월에 이 차를 제작했고 이 차 외에도 아래에 나오는 9인승 세단형 차량도 제작했다. 그러다가 1963년 5월까지 새나라자동차와 경쟁을 하다가 결국 사라졌다. 엔진은 김영삼(김영삼 전 대통령이 아니다)이 전통적인 대장간 거푸집 주조 방식으로 만들었다. 미국 자동차 회사 관계자는 시발차 공장에 와서 엔진 만드는 광경에 경악했다는 풍문이 있다. 초반에는 인지도가 낮았지만 1955년 10월 개최한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출품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영업용 택시로 인기를 얻게 되면서 생산능력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했고, 결국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전매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1963년 5월까지 3천여대를 만들어 시판했다.

새나라 자동차 사건으로 몰락

이런 시발택시가 새나라 자동차 사건으로 몰락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박정희 군부 세력은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고 자동차 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일제 소형차를 들여와야 한다는 논리로 일제 승용차 2천여대를 관광용으로 면세로 수입한 후 100% 마진을 붙여 일반택시로 분양했다. 이때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자동차부품수입을 무관세로 하고 자동차세를 감면하는 내용의 ‘자동차공업보호법’을 제정한다. 자동차공업육성을 명분으로 새나라공업주식회사에 특혜를 준 것이다. 일제승용차가 택시로 거리에 쏟아져 나오면서 시발택시는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수입 가격은 13만원, 하지만 국내업자에게는 25만원에 팔았다. 이에 박정희 군부는 2억 5천만원의 부당이익을 챙겨 정치자금을 마련했다. 그렇게 시발택시가 서울에서 사라지게 되고, 지방에는 1970년대까지 존재했지만 국산완성차 제조공업이 점차 발달하면서 포니 승용차가 나오게 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