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우리나라 최초 호족, 장보고

2023-07-25     어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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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장보고는 통일신라의 군인이면서 우리나라 최초 호족이다.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고향인 신라로 돌아와 군인이 됐고, 청해진 대사가 돼서 한중일 바다를 장악해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소에 넣었던 인물이다. 신라 왕실이 ‘청해진 대사’라는 직책을 줬다는 것은 사실상 자치권을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신라 왕실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통일신라 말기 신라 왕실의 통제가 지방에 미치지 못하면서 호족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시초가 ‘장보고’이다.

한국사에 기록된 최초 호족

장보고는 한국사에 기록된 최초 호족이다. 호족이라고 하면 중앙 귀족 또는 세력과 대비되는 지방의 세력을 가리킨다. 중국으로 이야기하면 ‘군벌’이라고 할 수 있다. 호족은 지연·혈연 등을 배경으로 토지와 농장, 노비, 자체적인 사병까지 거느리면서 해당 지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 골품제로 성골과 진골이 왕권 다툼을 하는 동안 6두품의 불만이 높아졌다. 장보고는 천민 계층이었다는 점에서 6두품의 불만보다 더 큰 불만을 가졌고, 결국 완도를 나와 당나라로 향했고,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 다시 통일신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흥덕왕에게 1만의 군사를 내어주면 해적을 소탕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흥덕왕이 1만의 군사를 내어줬다기보다는 1만의 군사 징발권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가 신라로 돌아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당시 당나라에는 이사도 번진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사도 번진을 진압하는 과정 속에서 장보고의 활약이 눈에 띄었고, 이에 벼슬까지 얻었다. 이사도 번진이 진압됐지만 이사도 번진의 잔당들이 신라로 넘어가 해적질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장보고가 신라로 진출해서 이사도 번진 잔당을 진압했다는 평가가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신라인들을 잡아다 노비로 팔아먹는 해적들이 들끓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장보고가 신라인들을 노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신라로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것은 당나라와 신라 그리고 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상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신라로 왔다는 이야기가 가장 유력하다. 당나라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었던 장보고로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데 그것은 신라와 일본으로 잇는 자신만의 상단 해상 루트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신라에 있던 해적들을 소탕해야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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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군사 징발권, 그것은 사실상 왕실 통제 약화

흥덕왕이 장보고에게 1만 군사 징발권을 준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당나라 무관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진골 귀족의 왕권 다툼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장보고에게 1만 군사 징발권을 부여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어쨌든 1만 군사 징발권은 사실상 신라 왕실의 통제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1만 군사 징발권은 막대한 경제력을 과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삼국 시대 백제 견훤왕에게 항복한 수달(능창)의 사병도 500명에 불과했다.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 역시 사병인 가별초가 2천여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1만명의 군사 징발권을 장보고가 갖고 있다는 것은 신라 왕실의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만의 군사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서라벌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리자 정년에게 5천의 군사를 맡겨 반란을 진압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정부군 10만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고, 이에 민애왕을 추격해 시해하고 김우징을 왕으로 세웠는데 신무왕이다. 10만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는 것은 사실상 1만 이상의 군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군사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의 경제력을 갖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완도라는 조그마한 섬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장보고가 막대한 경제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와 신라 그리고 왜로 이어지는 해상 루트를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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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장에 의해 살해됐지만

신무왕이 1년도 안돼 사망하고, 그의 아들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자신의 딸을 왕비로 들이겠다는 약속이 끝내 지켜지지 않으면서 결국 청해진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신라 왕실은 장보고의 난을 진압할 수 없는 상황이 됐는데 염장이 결국 장보고를 살해하면서 청해진은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장보고의 출현은 신라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됐다. 그것은 신라 왕실이 지방세력에 대한 견제와 통제를 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골 귀족들이 쿠데타를 통해 왕권을 잡는 사례가 빈번해지면서 지방까지 통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결국 호족의 출현으로 이어지게 됐고, 통일신라가 후삼국으로 넘어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