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 발발

2023-07-28     어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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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14년 7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 이전까지는 국지전 양상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그야말로 전세계로 전장이 넓어지면서 붙여졌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세계에 미친 영향이 대단했다. 철학에서는 실존주의가 탄생했고, 전세계에 이른바 경제대공황을 초래하게 된 원인이었고, 러시아제국이 무너진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이기도 했다.

유럽의 식민지 팽창

사실 18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은 전쟁터였다. 전쟁이 벌어지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1815년부터 1914년까지 유럽은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산업혁명이 이뤄졌고,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이러면서 유럽의 생산력은 그 이전과 비교를 할 수 없게 됐다. 문제는 생산이 비약적으로 늘어났지만 수요 즉 시장은 국한됐다. 따라서 상품을 판매할 식민지가 필요했고, 유럽 각국은 식민지 쟁탈전에 열을 올리게 됐다. 이때 신흥 강국으로 독일제국이 떠오르게 됐다. 그리고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미 영국 프랑스 등이 차지를 했기 때문에 독일제국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나라의 식민지를 총칼로 다시 빼앗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팽창주의에 대해 극도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이 과정 속에서 불만을 품은 나라는 세르비아 왕국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를 합병하고 러시아 제국이 독일제국의 압력으로 굴복되면서 세르비아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해 적대감을 품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부부가 암살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실상 전유럽의 갈등에 트리거 역할을 한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황태자 부부 암살에 세르비아 검은손이 개입됐다고 판단했고 이에 7월 28일 세르비에 왕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러시아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을 보호하기 위해 부분 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바로 총동원령으로 바뀌었다. 러시아의 총동원령에 위협을 느낀 독일제국은 결국 총동원령을 내리면서 러시아에 선전포고 하고 곧바로 프랑스에도 선전포고를 했다. 결국 프랑스도 독일과의 전쟁을 결의했고, 영국은 당초 참전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벨기에가 독일의 침략을 받으면서 결국 참전을 하게 됐다. 지지부진한 전쟁터는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전개하면서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됐다. 미국의 참전은 전쟁의 판도를 바꿔버렸다. 결국 독일을 포함한 동맹국들이 항복을 하면서 1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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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갈아넣은 전쟁

1차 대전은 젊은이들의 희생이 많았다. 끔찍한 전쟁이었지만 자원입대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유럽에서 점차 민족주의가 자리매김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민족을 지켜야 한다는 애국심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이전의 전쟁은 ‘영주와 영주’의 대결이었다면 이제는 ‘나라와 나라’의 대결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작동됐다. 더군다나 당시는 낭만주의가 팽배했던 시기였다. 나폴레옹과 같은 전쟁 영웅을 추앙했던 시기이다. 이런 낭만주의는 젊은이들에게 자원입대를 부추기는 것이 됐다. 뿐만 아니라 유럽이 앞서 언급한대로 산업혁명 시기로 접어들면서 전쟁이 없었다. 노년층은 전쟁의 참혹함을 알았지만 젊은이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몰랐다. 여기에 전쟁 물자가 대규모로 투입된 전쟁이기도 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전쟁무기도 발달하면서 기관총 등이 등장했다. 소총도 점차 발달하면서 개인화기가 엄청나게 발달했다.

참호전의 악몽

1차 대전을 참호전이라고 부른다. 땅을 파고, 그 안에서 전투를 하는 것이다. 이는 독일군이 서쪽으로 진격을 했는데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 막히면서 더 이상 진격을 할 수 없게 되자 점령지역의 유지와 방어를 위해 참호를 팠고, 연합군 역시 독일의 진공을 저지하기 위해 참호를 팠다. 참호전이 전개되면서 기관총, 야포, 철조망 등이 발달했다. 문제는 참호를 돌파할 효과적인 무기가 없다는 것이다. 장교들은 참호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없었다. 무조건 돌파하면 승리할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 그러다보니 장교들은 병사들에게 돌파를 명령 내렸고,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돌파를 해야 했고, 기관총이나 야포 등에 의해 희생됐다. 운 좋게 살아남더라도 비라도 온다면 참호는 진흙탕 참호가 돼야 했다. 자연스럽게 위생 문제가 걸리게 될 수밖에 없었고, 서부전선에서 병사들의 생존 기간이 평균 5일이었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반면 동부전선은 참호전 양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상대로 돌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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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피해 입어

1차 대전은 전사자 900만명, 민간인 사망자 600만명이었고, 부상자 2700만명, 불구자 600만명, 미망인 400만명, 고아 800만명을 남겼다. 이같은 인명 피해는 성비의 불균형을 가져왔고, 한 세대의 상실이라는 상처를 남게 만들었다. 또한 경제적 피해가 막대했다. 참전국은 막대한 국가 채무를 져야 했다. 상대적으로 미국은 1차 대전 초반에 참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전 유럽국가들은 경기 침체를 겪어야 했다. 서구 유럽들이 경기침체를 겪게 되면서 식민지에 대한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기에 이르렀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해서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실존주의 철학이 탄생하게 됐다. 실존주의 철학은 문학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또한 러시아 제국의 경우 제국의 몰락과 러시아 혁명을 가져오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