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담배
2023-08-01 어기선 기자
마야에서부터 파생된
담배는 서기 7세기께 마야 신전의 벽에 제사장이 담배 피우는 그림이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고대 마야 문명에서부터 담배가 있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흡연 문화가 기원전후 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주로 주술의식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으로 전파된 것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항해를 통해 원주민에게서 잎담배를 받아들이면서이다. 담배가 유행을 하게 된 것은 프랑스 장 니코가 약초로 담배를 재배하면서이다. ‘니코틴’이라는 담배 주요 성분의 이름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런 가운데 보급 초기에는 성적 흥분을 유발시킨다면서 악마의 도구라면서 배척을 했다. 하지만 점차 구취제거를 한다면서 학생들에게 담배를 권유하기도 했다. 20세기 들어서는 남녀 평등 사상이 팽배해지면서 여성 흡연도 적극 권장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담배회사들 역시 여성 소비자들을 늘리기 위해 ‘여성 흡연은 여성 해방 상징’이라는 슬로건을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군대에 담배가 보급됐다. 이는 전세계에 대량으로 담배가 보급되게 만들었다. 전쟁 중에 술은 엄격하게 규제했지만 담배와 커피는 병사들에게 적극 권장했다. 다만 독일의 경우 아돌프 히틀러는 흡연에 대해 부정적이면서 담배 공급을 막았다고 한다.아이들도 담배 피웠던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담배가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부터 들여왔다. 남령초(南靈草), 연다(煙茶), 연주(煙酒), 담박괴(淡泊塊), 담파고(談婆姑), 담바구 등 다양하게 불렸다. 다만 조선시대는 약초로 불렸다. 이런 이유로 별도의 제한이나 금기가 없이 남녀노소 장소를 가리지 않고 피웠다. 연장자에 대한 예의가 엄격했던 우리나라이지만 담배만은 예외를 두면서 여성들도 담배를 피웠다. 특히 정조대왕은 술과 함께 담배를 즐겼다. 정조대왕은 1796년 초계문신 친시(37세 이하 관리 중 유능함을 인정받아 선발된 신하들)에게 남령초(담배)의 이점을 자세히 증명해보라고 지시를 내렸을 정도이다. 또한 정조대왕은 자신의 편지에서 남령초 예찬론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담배에 대한 상소가 빗발쳤다. 1798년(정조 22년) 27명의 대소신료는 담배를 금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담배의 경작을 법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담배 경작으로 인해 쌀 생산량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끽연가인 정조대왕은 “담배농사를 짓는 여부는 전적으로 각 지방의 감사에게 달려있는 일”이라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같은 정조대왕의 담배 사랑에 좌의정 채제공은 정조 대왕에게 돌연 사의를 표명했다. 당시 채제공이 서대문을 지나가는데 새파란 청년 두명이 담배를 피고 있었고, 이에 채재공 수행원이 담뱃대를 빼라고 소리를 지르자 두 청년은 채제공의 이름을 부르면서 난장을 피었다고 한다. 이에 옥에 가뒀는데 한반중에 학당 학생들이 몰려와 채제공이 유생들을 욕보였다면서 철야농성을 보였다. 이에 채재공은 사의를 표명했고, 정조대왕은 이를 무마하느라고 진땀을 뺐다고 한다.구한말 금연운동 벌어져
1905년 구한말 일제에 빚을 갚기 위해 대한매일신보에서 ‘금연 동맹선언문’을 게재했다. 조선이 경제적 차관을 일본에게 지면서 경제적으로 허약하게 됐으니 금연해서 담뱃값을 아껴 빚을 갚자는 운동이었다. 기생들과 고종도 운동에 동참했고, 실제로 일부 빚을 갚았다. 그러자 일본은 또 차관을 떠안기는 식으로 해서 경제적으로 예속을 했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처음 만들어진 담배가 승리 담배이다. 그리고 백두산, 무궁화, 백구 등이 생산되면서 국산 담배 역사가 시작됐다. 이 당시 가장 유명한 담배는 1949년 제조된 군용담배 ‘화랑’이었고, 1981년 단종됐다. ‘전우야 잘자라’ 노래에서도 화랑담배라는 단어가 나온다. 지금은 담배의 폐해를 사람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흡연율이 해마다 줄어들기는 하지만 아직도 끽연가는 많이 남아있다.*흡연은 건강을 해칩니다. 금연을 희망하는 사람은 가까운 보건소 금연클리닉을 이용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