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8월 2일 일본제국 군인 무타구치 렌야 사망

2023-08-02     어기선 기자
무타구치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66년 8월 2일은 일본제국 군인 무타구치 렌야가 향년 77세로 사망한 날이다. 도미나가 교지, 츠지 마사노부와 함께 일본군 삼대 오물로 불리는데 무능한 일본군 장성으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둠의 독립운동가 혹은 한국광복군이 일본군 내부에 심은 공작원 등으로 불리며 비아냥 섞인 찬양 대상이기도 하다. 일본 패망 이후 전범재판이 열렸는데 전범재판에서 불기소된 인물이다.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그의 무능으로 인해 일본군 패망이 앞당겨졌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무능하면서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 패망을 앞당긴 인물이다.

중일전쟁 일으킨 장본인

무타구치는 1888년 태어났고, 22세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들어갔고, 1917년 29세 나이고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했는데 무타구치에 의해 발발됐다. 중일전쟁의 시작은 노구교 사건인데 당시 의문의 총성 몇 발이 난 후 일본군 병사 한명이 사라졌다. 이에 당시 대좌(연대장)으로 있던 무타구치는 국민혁명군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자신의 연대에게 국민혁명군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에 휘하 대대장 이치키 기요나오 소좌는 “공격해도 되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무타구치는 재차 공격 명령을 내렸고, 이것이 중일전쟁의 시작이었다. 연대장 직책으로 육군성이나 참모본부의 허락도 없이 독단적으로 공격 명령을 내려서 중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전투가 벌어지자 기자들이 몰려들었는데 무타구치는 피 묻은 붕대를 팔에 감고는 “국민혁명군의 도발을 격퇴하고 있다”고 했지만 무타구치는 전선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총리대선 코노에 후미마로는 확전을 처음에 반대했지만 며칠만에 일본군 증강을 허가했고, 결국 중일전쟁은 더욱 커지게 됐다.

술잔치 벌이다가

1940년 중장으로 진급한 무타구치는 싱가포르 전투에 참전을 했는데 왼쪽 어깨를 다친 사건이 발생했다. 부상 이유는 부대에서 술잔치를 벌이다가 갑자기 날아온 포격을 피하려고 도망가다가 하수구를 대피소로 착각했고, 이에 숨으려고 하다가 다쳤다. 하지만 윗선에 보고는 끝까지 부대를 지휘하다가 다친 것이라고 보고를 했고,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1941년 12월 무타구치는 지트라 전투에 사단장 자격으로 참여했고, 영국군은 55일만에 무너졌는데 일본군은 영국군의 보급품을 뺏어먹으면서 진격을 했다. 이에 무타구치는 보급품을 빼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고, 훗날 임팔전투에서 대패를 하게 한 원인이 됐다.
임팔전투

임팔전투

무타구치는 1943년 3월 제15군 사령관으로 버마 전선에 투입됐다. 이때 본토(일본)은 인도 진공 계획을 세웠는데 무타구치는 밀림과 산악 때문에 어렵다면서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훗날 역사가들은 이때 만약 일본제국 군대가 인도로 진격했다면 성공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1944년 3월 8일 무타구치는 느닷없이 인도로 진공을 한다. 그동안 인도 진공은 무리수라면서 격렬하게 반대를 했느데 느닷없이 진공을 한 것이다. 임팔 작전은 버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직접 넘어 인도 제국 북부인 아삼을 기습해서 점령한다는 작전이고, 병사들에게는 15일 작전이라면서 15일치 식량만 휴대하고 진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실제 작전 기간은 3달이 됐다. 당시 진격 명령 최종 인가는 도조 히데키가 내렸는데 자신의 집 목욕탕에서 최종 인가를 내렸다. 이에 훗날 ‘목욕탕 결재’라고 명명했다. 아라칸 산맥을 15일 만에 넘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일본군은 영국군과 마주할 때 병력 절반 이상이 영양실조와 피로로 전투를 치르기 힘들었다.
임팔전투에

부하의 항명

임팔전투에서 굶어죽어가는 일본군을 묘사한 드라마가 있는데 MBC 여명의 눈동자이다. 여기서 풀뿌리를 씹고, 독충인 노래기를 잡고, 뱀까지 산채로 먹는 장면이 있었는데 임팔전투 때 일본군이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휘하 부대장들은 계속해서 철군을 해줄 것을 무타구치에게 호소했지만 무타구치는 듣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연합군에 붙잡힌 무타구치는 그때 왜 철군을 하지 않았냐고 하니 ‘자존심’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실제로 당시 버마 사령관 가오베가 무타구치를 찾아 왔을 때 무타구치는 자신의 작전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상부에 보고할 수 없기 때문에 작전은 그대로 진행했고, 철군 명령이 하달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자존심 때문에 후퇴를 하지 못하고 상부에서 후퇴 지시가 내려오기만 기다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헌병이 이 사실을 들었을 때 5분 동안 비웃었다고 한다. 결국 휘하부대 중 사토 중장이 철군 요청을 하려고 무타구치를 만났지만 무타구치는 할복 자결하라면서 단도를 던졌다. 훗날 사토 중장은 단도로 무타구치의 배를 찌르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결국 사토 중장은 무타구치의 지시 없이 철군을 감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후 첫 번째 항명이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사토 중장은 결국 정신병이라는 사유로 일본으로 송환된 후 연금당했다. 평소 같으면 불명예 제대 및 군사재판을 받거나 할복을 해야 하는데 다른 파벌이나 해군에게 꼬리가 잡힐 수 있다고 판단한 일본 육군은 사토 중장을 연금해서 침묵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일본 육군은 임팔전투의 패배를 사토 중장에게 뒤집어 씌웠다. 그러는 사이 무타구치는 시찰이라는 핑계로 도망을 갔고, 제15군단은 무너졌다. 제15군단이 무너졌다는 것은 사실상 일본 육군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 육군은 회복할 수 없는 치명상을 안았다. 가뜩이나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를 하면서 크게 위축됐는데 여기에 임팔전투에서 15군단이 무너지면서 일본 육군도 크게 위축됐다.

패망 이후

패망 이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됐다. 하지만 다른 전범들은 전범 재판을 거쳐 사형을 받았지만 무타구치는 끝내 불기소가 됐다. 2년 정도 감방 생활을 했지만 연합군 대접이 좋아서 살이 더 쪘다고 한다. 일본에 돌아온 후 조용한 삶을 살다가 1962년 별안간 임팔 전투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잘못으로 패배했다고 주장했다. 역사가들은 제대로 된 장교가 만약 임팔 전투를 임했다면 영국군이 승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장수가 임팔전투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군 내부의 문제 때문이다. 실무 능력 보다는 학연과 인맥 등으로 진급이 결정되는 일본군 특유의 파벌주의 때문이다.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무타구치가 무능력함에도 불구하고 초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무타구치가 없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