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거북선
2023-08-02 어기선 기자
고려시대부터 거북선 운용
사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형태의 거북선은 아니더라도 고려시대 군한 과선 즉 배에 창칼을 박아 적의 침입을 막는 배와 여말선초에 개발됐던 검선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태종실록에서도 거북선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역사학자들은 태종 때 만들어진 거북선과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이 같은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를 하고 있지만 밝혀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과거의 사례에서 참조해서 건조했다는 것이다. 태종실록에 나온 거북선은 옻칠한 나무 지붕에 쇠못을 빼곡히 박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를 이순신 장군이 쇠철판을 덧씌웠는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역사적 기록에는 ‘철갑선’으로 나오지만 일부 학자들은 지붕에 철갑을 덧씌우게 된다면 무게 중심 문제 때문에 침몰했을 것이라면서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화포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머리가 무거우면 화포를 쏘다가 배가 뒤집어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쇠못을 박은 것을 마치 철갑을 두른 것처럼 생각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워낙 많은 기록에서 ‘철갑선’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철갑선이 맞는 것으로 파악된다.실제 위력은
거북선에 대해서는 공포스럽다는 기록들이 많이 있다. 거북선의 위력은 일본에서 더 크다. 에도 막부 시대에서는 거북선을 복카이센沐海船(=목해선)이란 괴물 배로 불렀다. 그만큼 일본에서는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메구라부네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군 방답진 소속 방답 귀선, 전라좌수영 소속 영귀선, 통제영 창설 이후 통제영 귀선 등 3척이 있었지만 칠천량해전 당시 모두 침몰했다. 거북선의 위력이 만약 생각보다 강했다면 많은 배를 건조했을텐데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수(射手 : 활 쏘는 군인)와 격군(格軍 : 노 젓는 군인) 때문이다. 거북선은 활을 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활을 쏘는 사수 대신 격군의 숫자가 판옥선에 비해 많았다. 하지만 충파(배를 깨부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속도가 필요한데 그러자면 더 많은 격군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충파의 위력이 과연 있었겠냐는 의문이 든다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용머리 아래 도깨비 모양의 철판이 있었던 것으로 보면 충파의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런 이유로 거북선은 주로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서 화포를 쏘는 방법으로 왜군의 진열을 흐트러뜨리는 용도가 아니었겠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임진왜란 당시 용머리에는 화포가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거북선 용머리에는 연기만 피우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용머리에 화포를 쏘면 용머리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총기들도 계속 해서 쏘아대면 총구가 망가지듯이 그 옛날 쇠의 품질이 약했기 때문에 몇 번 화포를 쏘게 되면 용머리가 망가지기 일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