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8월 8일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2023-08-08     어기선 기자
사진=김대중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73년 8월 8일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유신 반대 운동을 펼쳤다. 이에 중앙정보부가 김 전 대통령의 납치해서 살인을 하려고 하다가 미수에 그쳤다. 일본에 체류하던 김 전 대통령을 납치해서 먼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던 사건이 온세상에 알려지면서 유신정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면서 유신독재 반대투쟁은 더욱 거세졌고, 그것이 결국 훗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연결이 된다.

10월 유신 반대했던 김대중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야당 정치인으로 1972년 10월 유신 단행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혔다. 김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 11일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 및 일본 정계 인사들과 만나기 위해 도쿄를 방문했다. 그런데 같은 달 17일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그대로 해외 망명을 결심했다. 그것은 10월 헌법이 초법적인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에 남아있으면 김 전 대통령은 제거 1순위였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일본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약칭 한민통을 결성하고 초대 의장으로 취임해 미국과 일본의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이어갔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눈엣 가시가 됐다. 이에 중앙정보부는 김 전 대통령의 배우자 이희호 여사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의 국내 정치활동을 보장할테니 귀국하도록 설득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발을 묶어 놓을 것이 뻔하다면서 거절을 했다.

납치의 그날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 일본 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 객실 2212호에는 민주통일당 당수 양일동, 김 전 대통령의 조카뻘이자 국회의원이었던 김경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담소를 나눴고, 이후 자유민주당 중의원 키무라 토시오와의 면담을 위해 약속장소로 향하던 김 전 대통령은 괴한 5명에 의해 납치됐다. 범행 현장에는 백두산 담배, 배낭, 휴지, 노끈, 마취제, 탄창 등의 유류품이 남아있었다.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던 도중 엘리베이터에서 일본인 남녀와 마주친 김 전 대통령은 일본어로 “납치된다. 살려주시오”라고 소리쳤지만 야쿠자 싸움인줄 알고 외면했다고 한다. 괴한들은 안가에서 김 전 대통령의 옷을 작업복으로 갈아입히고, 눈과 입을 포장용 테이프로 막고, 다시 차에 태워 1시간 정도 달려서 바닷가에 이르렀다. 그리고 모터보트에 태워서 중앙정보부 공작선 536톤 용금호에 태운다.
사진=연합뉴스

김대중 찾아라

용금호 사람들은 김 전 대통령을 배밑 선실로 끌고 가 손발을 묶고, 눈에는 테이프를 여러 번 붙인 다음 붕대로 감았다. 이때 이들은 손발을 묶으면서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혹은 “솜이불을 씌워 던지면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을 주고 받았다. 용금호가 전속력으로 항해하던 중 김 전 대통령은 번적하는 불빛과 함께 굉음을 느꼈고, 선실에 있는 사람들은 “비행기다”고 외쳤다. 해당 비행기는 미국 CIA 연락을 받은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일본 정부에서는 일본 자위대 비행기나 해상보안청 헬기가 출동한 기록이 없었다. 따라서 해당 비행기가 미국 CIA인지 일본 정부인지 아니면 제3의 비행기인지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미국 CIA는 김 전 대통령의 납치 소식을 듣고 김 전 대통령의 소재 파악에 들어갔다. 당시 CIA 한국 지부장이었던 도널드 그레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이 납치된 이후 24시간 동안은 미국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그 이전에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고, 도널드 그레그 본인은 중앙정보부에 전화를 걸어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전해졌다. 용금호에 어떤 전화가 걸려왔고, 전화를 받은 선원들은 김 전 대통령의 복면을 벗기고 손을 풀어주면서 마실 것을 줬다.

8월 11일 부산항 도착

김 전 대통령은 8월 11일 부산항으로 추정되는 항구에 도착한 후 8월 13일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났다. 그 이후 김 전 대통령은 남산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누가 납치를 했는지를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게끔 진술했다. 이로 인해 중정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김 전 대통령의 사저에 기자 및 외부인 접촉을 차단했다. 또한 일본에도 수사를 이유로 김 전 대통령을 보낼 수 없다고 통보했다. 박정희 정권은 정부 개입설을 부정했지만 중정의 한 고위 간부가 이후ᅟᅡᆨ에게 “무슨 일을 그리 서툴게 해서 일을 시끄럽게 키웠냐”고 하자 이후락은 “야! 사람이 사람 잡는 게 그리 쉬운 줄 알아?”라고 발칵 화를 내서 중정의 소행임이 드러났다.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를 무마하기 위해 다나카 당시 일본 총리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재미 언론인 문명자씨는 1977년 우리 정부가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을 통해 다나카에게 돈을 제공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오마이뉴스가 익명의 국정원 진실위 관계자 인터뷰를 인용해 김대중 사건 직후 조중훈이 별다른 이유 없이 대통령에게 불려간 일이 있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이 사건은 훗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연결됐다.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약칭 한민통을 결성한 것을 북한의 사주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면서 사형을 언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