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황희 정승
2023-08-08 어기선 기자
두문동 출신?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두문동 출신이라는 점이다. 두문동 72현 전설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태종 이방원이 두문동을 불태워서 모두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그 어디에도 없다. 조선왕조실록이 비교적 사실에 입각한 기록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사실을 사관이 적어두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황희 정승이 두문동 출신이라는 점 역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날 역사학자들의 생각이다. 또한 두문동에서 확인된 사람은 2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72현으로 둔갑한 것은 공자의 제자인 72명 숫자에 맞췄기 때문으로 판단된다.태종이 눈독 들여
황희 정승은 태조 이성계 시절 사직하고 벼슬에 나아가기를 몇 번이나 했다. 그러다가 태종이 즉위하면서 태종 이방원은 황희 정승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에 따라 관직을 높여줬다. 이에 도승지와 6조 판서를 모두 역임했다. 오늘날로는 대통령 비서실장, 행정각부 장관 자리를 계속 지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폐세자 건 당시 양녕대군을 두둔하면서 태종의 노여움을 사면서 파직해 유배를 갔다. 훗날 황희는 세자(양녕대군)이 너무 가여워서 그랬다고 변명했다. 태종은 훗날 세종대왕에게 양위를 하면서 황희 정승을 조정으로 불러들일 것을 권유하면ㄴ서 재출사 했다. 그러면서 우의정 반열에 올랐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사회부총리이다. 그리고 곧 좌의정 즉 경제부총리가 됐고, 그 이후 영의정 즉 국무총리가 됐다.능력은 알아줬지만
사실 능력은 상당히 알아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대왕 당시 황희 정승이 몇 번이건 사직 상소를 올렸지만 윤허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세종대왕이 사람을 너무 혹사시킨 것 아니냐는 지적도 하는데 황희 정승이 남들의 눈 때문에 형식적으로 사직 상소를 올렸고, 세종대왕도 이를 간파했기 때문에 윤허 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기록들을 살펴보면 과연 ‘청백리’ 재상이 맞냐는 말들이 나온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달 사건’이다. 사위인 사달이 시골을 지나다가 아전이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하지 않고 달아났다고 해서 아전을 두들겨 팼다. 그리고 아전은 사망했다. 서달의 아버지 서선이 형법을 담당하는 형조판서인데다 장인이 황희 정승이었기 때문에 해당 수령은 황희 정승에게 알렸고, 황희 정승은 사건을 은폐하기에 이르렀다. 피해자의 처를 협박하고 뇌물을 써서 그 친족을 회유하고, 왕에게 올리는 상주문을 가로채기도 했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조작된 상주문을 읽어본 후 이상하다고 해서 의금부에 조사를 명했고, 진상이 밝혀졌다. 당시 조작된 상주문은 황희 정승을 비롯해서 6조 판서, 고을 수령, 피해자 가족들도 개입한 것인데 세종대왕은 그 상주문을 읽고 조작됐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당시 조작에 가담했던 황희 정승과 맹사성이 곤장을 맞고 유배를 갔다. 사건을 일으켰던 서달은 사형에 처해지려고 했지만 독자(獨子)라는 이유로 곤장 100대에 3천리 유배, 3년 노역치 벌금의 처벌을 받았다. 황희 정승의 처남들의 위법 행위를 감싸준 경우도 있고, 관청에서 몰수한 장남 황치신의 과전을 돌려주려고 세종에게 개인적으로 글을 올린 적도 있다. 황희 정승이 청백리 정승이라는 평가가 있지만 실제로 자신의 친인척 일에는 눈을 감아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오해가 있는 부분도 있다. 그것은 박포의 처와 간통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호문이라는 사관이 왜곡된 평가를 남겼기 때문이라고 정인지나 성삼문 같은 이들이 판단했다. 이에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을 삭제하려고 했지만 실록을 고친 전례를 남길 수 없다는 이유로 남아있게 됐다.능력과 청백리 사이에서
능력 면에서는 황희 정승은 명재상은 분명했지만 ‘청백리’ 부분에서는 청백리 재상은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은 24년을 정승에 앉혔다. 그것은 세종대왕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황희 정승의 모습만 보면 탐관오리가 아닐까는 의심이 갈 정도였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그것을 제대로 컨트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서달 사건’이다. 명재상이 탄생한 것은 그 사람을 운용하는 사람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옛말에 용감한 장수 밑에 약병이 없다는 말이 있다. 명재상이 되고 안되고는 결국 그 사람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