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구빈법

2023-08-08     어기선 기자
엘리자베스1세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구빈법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1601년 처음 도입됐다. 구빈법은 인클로저 운동과 더불어 산업혁명으로 나아가는 ‘노동력’을 공급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고 있다. 아울러 오늘날 사회복지제도의 원류가 아니냐는 평가도 있다. 이런 이유로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평가 특히 구빈법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갈린다. 영국 내 부랑자를 말끔하게 해소한 인물이라는 평가와 함께 포로수용소와 같은 생활을 하면서 인권을 말살시킨 여왕이라는 평가도 있다. 한편, 자본가 입장에서는 구빈법으로 인해 값싼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면서 그에 따라 점차 산업혁명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사진=픽사베이

인클로저 운동과 함께

영국 농촌에서는 인클로저 운동이 벌어졌다. 자신의 토지를 명확히 하자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토지의 소유권이 불분명하면서 이른바 공유지는 누구나 사용이 가능했다. 하지만 인클로저 운동이 벌어지면서 토지 소유권이 불분명했던 공유지가 점차 줄어들면서 농촌 빈민들은 더 이상 농촌에서 살기 힘들게 됐다. 이러면서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게 됐다. 하지만 도시도 인구가 갑작스럽게 증가하면서 일자리가 부족하게 됐고, 결국 도시로 온 사람들은 도시의 부랑자가 됐다. 그러면서 ‘구걸’로 연명하게 됐다. 부랑자가 넘쳐나게 됐다는 것은 영국 왕실로서는 납세의 의무를 지는 사람들이 부족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부랑자를 구호하는 것이 카톨릭교회에서 봉사활동 개념으로 그동안 해왔다. 하지만 성공회 시대가 되면서 영국 국교호의 수장인 영국 국왕에게 그 책임이 넘어가게 됐다. 이에 영국 국왕은 각 영주에게 구걸 면허를 발급할 권리를 하사하고, 구걸 면허를 가진 부랑민들의 머릿수만큼 조세 세목을 전유할 권리를 줬다. 다시 말하면 부랑자는 영주에게 구빈세라고 해서 구걸 면허를 받는 대신 세금을 각 지역 영주에게 납부했다. 그리고 이 세금은 중앙정부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지방영주의 탈루 목적으로 사용하게 됐다. 그러면서 구빈세가 남발하게 됐다. 이에 엘리자베스 1세는 구빈법을 고안하게 됐다.
사진=픽사베이

부랑자 강제수용으로

이는 각 영주의 권한이었던 구걸 면허를 중앙정부로 빼앗고, 이들 잉여 인력에게 일자리를 알선해주는 법이었다. 즉, 과거에는 각 지방 영주가 구걸 면허를 발급해줬다면 이제는 중앙정부가 구걸 면허를 발급하게 됐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도시 부랑자가 넘쳐나게 되면서 또 다른 고민에 빠지게 됐다. 넘쳐나는 부랑자에게 모두 구걸면허를 준다면 그로 인해 도시는 부랑자로 넘쳐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줘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에 이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해줬는데 문제는 강제로 일자리를 배정했다는 점이다. 부랑자를 건강한 부랑자, 무력한 부랑자, 요보호 아동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이들 인력을 상공업으로 돌려서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박정희 정권의 ‘국토건설단’ 등을 떠올리면 된다. 영국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값싼 노동력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왕실이 부랑자들을 노동자로 만들어서 자본가들에게 공급을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본가는 앉아서 돈을 벌 수 있게 되면서 막대한 자본을 쌓게 됐다. 그 막대한 자본을 또 투자를 하게 되면서 산업자본이 크게 성장하게 되면서 산업혁명의 바탕이 됐다.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구빈법을 바탕으로 값싼 노동력을 확보한 자본가가 끊임없이 자본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자본가 입장에서는 사업에 실패할 가능성도 없고, 사업에 실패를 한다고 해도 값싼 노동력은 언제든지 공급이 가능했기 때문에 재기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인도라는 식민지 시장이 개척되면서 자본가는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듯이 경영을 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