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8월 22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됐다. 공포는 29일이다.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이뤄진 합병 조약인데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된다는 조약이었다.
해당 조약은 불법적으로 이뤄졌고, 일제 36년의 치하로 인해 우리 백성들은 수많은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을사조약으로 보호국 된 이후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기면서 일본 보호국이 됐고,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군대 해산을 당했고, 사법권과 감옥사무 등을 잃어버린 대한제국이 1910년 8월 22일 결국 일본 제국에 강제 병합된 것이다.
일본제국의 병탄 방침은 1909년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이미 확정됐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짜놓기 시작했다.
송병준은 1909년 여러 차례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서 매국흥정을 했다. 이완용은 국내에서 일본인과 조선 병탄 문제의 교섭에 나섰다. 이처럼 송병준과 이완용이 국내외에서 매국흥정에 나선 것은 통감부가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송병준 내각을 구성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면서이다. 그러면서 이완용과 송병준은 충성경쟁을 한 것이다.
이완용은 송병준에게 내각을 빼앗기면 자신은 정치적 보복을 당할 것이 두려워 통감부에게 자신에게 매국흥정 주도권을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치마 들춰내서
8월 22일 일본제국은 나남, 청진, 함흥, 대구 등에 주둔했던 일본군을 서울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창덕궁 흥복헌에서는 어전회의가 열렸다. 학부대신 이용직은 조약을 반대하면서 쫓겨났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8명이 어전회의에 참석했다. 이들은 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했다.
이때 친일파들은 숭종황제에게 옥새를 찍으라고 강요했다. 그것을 엿들었던 순정효황후는 옥새를 가져다가 치맛자락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다.
비록 친일파 대신들이라고 해도 황후의 치마를 들출 수가 없었기 때문에 주저했지만 윤택영의 형이면서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친일파 윤덕영은 순정효황후의 치마를 들춰서 옥새를 빼앗고 말았다.
순정효황후의 이런 행동은 결국 한일 병합 조약이 원천 무효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가 되고 있다.
한일기본조약
이후 1945년 8월 15일 해방됐고,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는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무효임을 확인했다.
다만 우리나라와 일본은 그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체결부터 원천 무효를 주장하고 있는 반면 일본 측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인해 현 시점(1965년)에서는 이미 무효’라고 주장한 것이다.
우리나라 대법원은 2018년 10월 30일 한일 병합이 원칙적으로 무효임을 확인하면서 강제징용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손해 배상 청구권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