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프랑스 화가 밀레는 노르망디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37년 파리에 가서 들라로슈의 제자가 됐고, 루브르 미술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 후 1848년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들’이 샬롱에 당선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듬해에 바르비종으로 이사해 농민들의 생활모습을 그렸는데, 대표작으로는 ‘이삭 줍는 사람들’, ‘만종’ 등이 있다.
당시 대표작을 내놓았지만 보수 우파에서는 ‘계층 갈등을 조장하는 사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밀레는 사회주의 등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일축했다.
결국 프랑스 내에서는 밀레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없었지만 해외에서 관심을 가지면서 훗날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측은 거액으로 밀레의 그림을 해외에서 사와야 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 농촌에서는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대혁명이 벌어졌다. 프랑스 대혁명은 특정 ‘년도’에 발생한 대혁명이 아니라 몇 차례 걸쳐서 이뤄진 혁명이었다. 그러는 사이 1공화국도 생겨났고, 나폴레옹 황제가 나타나는 등 정치적 격변기가 일어났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한 이유 중 하나가 부르주아 계급이 발생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프랑스 당시 농촌 생활이 그야말로 처참했기 때문이다.
루이14세, 루이 15세, 루이 16세를 거치면서 왕권은 강화됐지만 경제는 그야말로 엉망이 됐다. 루이 14세는 부족한 예산을 빚으로 충당했고, 루이 15세는 막대한 부채를 떠안아야 했다. 루이 15세 역시 부채를 떠안은 상태에서 사망하자 루이16세는 막대한 부채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사치는 늘어났는데 귀족들도 그 사치에 동참을 했다. 여기에 1785년부터 계속해서 가뭄과 홍수가 프랑스를 강타했다.
그런데 징세청부업자들은 이삭줍기 등을 무시한 채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이삭줍기라는 권한이 있었다. 밀을 수확하면 바닥에 떨어진 밀 이삭은 밀밭의 주인이 아니라도 가져가도 된다는 암묵의 룰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징세청부업자들은 이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농촌에서는 식인 문화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나그네가 농촌을 지나가면 농민들은 그 나그네를 죽여서 먹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농민 봉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결국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는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밀레의 작품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은 이런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작품이다. 이런 이유로 평화로운 프랑스 농촌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처참한 프랑스 농촌의 현실을 그렸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 징세권자들에 의해 박탈됐던 이삭줍기권이 다시 회복되면서 농촌의 최하층민이 이삭을 줍는 모습과 저 멀리 추수를 끝낸 지주들의 모습이 대비가 된다.
추수를 끝낸 지주들의 모습은 밝은 색으로 이삭 줍는 여인들은 어두운 색으로 해서 농촌의 소득불평등을 표현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성경에서 이삭 줍는 여인은 2명인데 작품에서는 3명으로 나왔고, 여인의 모자와 옷의 색깔이 파랑, 빨강, 흰색으로 표현되면서 프랑스 대혁명을 상징했다는 분석도 있다.
밀레는 생전에 사회비판적인 내용으로 작품을 만든 것은 아니고 농촌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했지만 오늘날 작품 해석에 있어 사회비판적 요소가 들어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만종이다. 부부가 감자바구니 앞에서 기도를 하는 모습인데 현대에 기술이 발달하면서 감자바구니 뒤에 있는 실제를 파악하기 위해 엑스레이 검사를 했더니 실제로 바구니 주변에 직사각형 형태의 펜 선이 있는 게 확인됐다.
이에 감자바구니가 아니라 죽은 아기의 관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즉, 만종이 한가로운 농촌의 풍경이 아니라 고통으로 얼룩진 농촌의 현실을 묘사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만큼 프랑스 대혁명 전후 농촌 경제의 현실은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프랑스 농민들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 대혁명에 동참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