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물산장려운동

2023-09-02     어기선 기자
경성방직주식회사의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물산장려운동은 이른바 ‘애국 마케팅’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물산장려운동은 경성방직주식회사서부터 처음 시작됐고,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1920년대 침투하는 일본 자본을 막아내기 위한 애국 마케팅이었지만 그에 따른 한계도 분명하게 존재했다. 아직 산업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애국 마케팅에만 의존하면서 오히려 조선인 자본가의 배만 불리게 됐다는 비판도 있다.

회사령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1910년까지 일제는 무단통치를 했었다. 하지만 1919년 3.1만세운동을 계기로 무단통치만으로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각종 회유책이 쏟아졌는데 언론의 자유가 대표적이었고, 회사령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꾼 것도 대표적이다. 회사령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꾼 것은 3.1 운동의 영향도 있었지만 일본의 상황과도 연결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은 승전국이 됐다. 그러면서 웅비를 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지만 경제 불황이 닥치기 시작했다. 경기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이에 일본 자본이 조선에 진출하게 해야 했다. 그러자면 회사를 세우는 것을 ‘허가’가 아닌 ‘신고’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회사령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뀐 것은 조선인 자본가들 입장에서도 회사를 세울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그러면서 속속 회사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22년 일본이 관세를 철폐한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중심으로 물산장려운동이 벌어졌다.
사진=픽사베이

신토불이

물산장려운동의 핵심은 ‘신토불이’다. 즉 조선 땅에 나는 것을 조선인이 소비하자는 운동이다. 일본 등 타국 물건 대신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사용하자는 것으로 평양에 있는 조만식 등 조선인 자본가들 중심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경성부에 지부가 설치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민족언론이 세워지면서 민족언론을 중심으로도 물산장려운동이 확산됐다. 그러면서 남자는 무명베 두르마기를, 여자는 검정물감을 들인 무명치마를 입자는 운동이 그 첫 번째이고, 우리 손으로 만든 토산품을 사용하는 것이 두 번째이고, 부득이하게 외국산품을 사용하더라도 가급적 절약을 하자는 것이 세 번째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여자들이 검정 무명치마를 입게 된 것도 물산장려운동의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조선인 자본가의 배만 불리는

물산장려운동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지만 그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일본에 비해 조선인 자본가들은 그만큼의 생산설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수요는 넘쳐나는데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가격 폭등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조선인 자본가들의 배만 불리게 된 것이다. 문제는 당시 조선인 자본가들 상당수가 일본과 협력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애초 우리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한 물산장려운동이지만 결국 일본만 좋게 만들어줬다는 비판이 나온다. 1920년대 사회주의운동이 파다하게 퍼지게 된 원인도 물산장려운동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산장려운동으로 인해 오히려 가격이 폭등하는 상황이 됐고, 조선인 자본가의 배만 불리게 만드면서 사회주의계열 인사들은 이 문제를 갖고 백성들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갔고, 사회주의 운동이 퍼지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