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Hi스토리] 화신백화점

2023-09-05     전완수 기자
1960년대
[파이낸셜리뷰=전완수 기자] 화신백화점은 일제강점기 생긴 최초이자 유일한 우리 자본 백화점이다. 근대건축 교육을 받은 최초의 한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최초의 근대식 상업건물이기도 하다. 서울특별시 종로의 종각 네거리, 현재 종로타워에 자리했던 건물이고, 운영법인은 화신그룹의 모기업이던 화신산업이었다. 소유주인 박흥식이 친일파 논란이 불거지면서 결국 쇠퇴를 하게 됐고, 역사속에서 사라지게 됐다.

일본은 남대문 중심으로 조선인은 종로 중심으로

강화도 조약으로 인천 제물포가 개항을 하면서 청나라 상인들이 몰려왔다. 그러면서 종로 지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상권을 장악해 갔다. 종로 지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상권을 장악한 것은 조선시대부터 종로는 육의전을 중심으로 한 상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하면서 종로 지역 상권은 일시적으로 공백 상태에 놓이게 됐다. 일본이 진출을 했지만 주로 남대문이나 명동 등을 중심으로 했을 뿐 종로를 중심으로 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종로는 빠르게 조선인들이 자리를 잡게 됐다. 과거 육의전 골목이었던 종로가 빠르게 조선인의 상권으로 형성되면서 1890년대 말 ‘신태화’라는 상인이 신행상회라는 이름의 귀금속 상점을 열었다. 그리고 1918년 자신의 이름인 ‘화’와 신행상회의 ‘신’을 따서 화신상회를 열었다. 화신상회는 1920년대 서울에서 가장 큰 귀금속 상점이 됐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잡화를 취급하게 됐다. 그러던 상황 속에서 1931년 화신상회의 경영권이 박흥식에게 넘어갔다. 박흥식은 지물사업을 기반으로 화신상회에 자금을 대고 있었는데 화신상회가 경영난을 겪으면서 신태화는 박흥식에게 경영권을 넘겨준 것이다. 그러면서 목조건물이었던 화신상회는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새로 지어 올렸다. 1932년 화신상회 옆에 동아백화점이 세워지면서 박흥식은 새로운 도박을 했다. 그것은 집 1채를 경품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동아백화점은 개점 6개월 만에 화신상회에 인수합병됐다. 이에 기존 화신상회 건물과 동아백화점 건물을 서로 연결하면서 서관과 동관으로 나뉘게 됐다.

대화재 이후

그런데 1935년 1월 27일 저녁 화신상회가 불이 난 것이다. 백화점 2동이 통째로 불에 휩싸이면서 총독 역시 직접 진화에 나섰다. 불은 당시 서관 옆에 있던 대창무역 소유 공터에서 발생했는데 당시 장사를 하던 과일 노점상이 놓았던 촛불이 사과를 덮은 겨에 옮겨붙었고, 그것이 서관 외뵥 목재 광고판에 옮겨 붙으면서 동관까지 타버린 것이다. 박흥식은 조선총독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를 찾아가 “백화점 2동이 타버리는 동안 종로소방서는 무얼 하고 있었냐”고 따졌다. 그러면서 종로경찰서 구관을 빌려달라고 요구했고, 이것을 들어줬다. 해당 장소에서 임시 개장을 해서 영업을 했고, 1936년 12ㅇ월 동관 일부를 다시 개장했다. 그리고 서관은 새로 짓기로 결정했고, 대창무역 부지까지 사들여 연건평 2,000평이 넘는 지하 1층 지상 6층의 신관을 완성시켰다. 이는 당시 경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이에 ‘상회’라는 명칭을 떼버리고 이때부터 ‘백화점’ 명칭을 사용하게 됐다. 그러면서 상회 때에는 무질서한 상품 배치 등을 했는데 이때부터 백화점식 상품 배치를 하면서 근대적 백화점의 모습을 점차 갖춰갔다. 또한 매장 안에 엘리베이터 4대, 그리고 에스컬레이터 2대를 조선 최초로 설치하는 한편 건물 옥상 정면에는 전광판을 설치해 그날 그날의 뉴스를 내보내는 등의 모습으로 남촌에 밀집한 일본계 백화점에 밀리지 않았다. 게다가 경성전기주식회사와 협의해 전차정류장 이름을 ‘화신앞입니다’라고 해서 백화점 선전 효과를 거뒀다. 화신 백화점은 우리나라 사람이 설계한 최초의 서양식 상업 건축물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가졌다.
화신백화점

광복 이후 쇠락

화신백화점은 광복을 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종업원들이 자치위원회를 만들어 친일파 박흥식 사장 대신 백화점을 장악했다. 그러다가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박흥식이 다시 화신백화점을 장악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내부가 불탔고,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백화점 직영이 곤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861년 5.16 쿠데타 이후 외래품 판매 금지를 실시했다. 그리고 곳곳에서 백화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일본인 백화점이었던 미쓰코시백화점(三越百貨店)은 이름을 동화백화점으로, 조지야백화점(丁子屋百貨店)은 중앙백화점으로 고쳤다. 동화백화점은 규모가 커서 국가가 직영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이유로 관재청 직할로 운영되다가 1958년부터 조선방직에 불하됐으나, 1962년 동방생명을 거쳐 이듬해 삼성그룹에 넘겨졌다. 그리고 1963년 신세계백화점이 됐다. 중앙백화점은 24군단 PX로 미군 상대로 영업을 했다가 1954년 대한부동산이 인수하면서 미도파백화점으로 바꿨다. 이후 무협으로 넘어간 뒤 1964년 (주)무역협회로 독립했다가 1969년 대농그룹으로 넘어갔다. 그러다 1998년 대농그룹이 몰락하면서 2002년에 롯데쇼핑이 인수, 롯데백화점 영플라자가 됐다. 화신백화점은 한국전쟁으로 백화점 직영이 곤란해지면서 1956년 10월부터 일반에게 임대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신산업은 1955년 11월 15일 종로1사 화신백화점 근처 자매백화점인 ‘신신백화점’을 개점했다. 그러면서 1950년대 백화점 상권은 미도파백화점이 선두를 지키고, 화신과 신신백화점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1979년 소공동에 롯데백화점이 개점을 했고, 화신백화점은 경쟁에서 점차 뒤처지기 시작했다. 결국 1979년 화신그룹은 해체했고, 그 이후 (주)신생 소유였으나 1986년에 최종적으로 한보그룹 계열 한보주택이 화신백화점의 주인이 됐다. 이후 1987년 부지 소유권이 동방생명으로 넘어간 후 마침내 신규 건축 허가가 떨어지면서 화신백화점은 폐업되고 그 해 철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