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훈 칼럼] 푸틴이 고르비를 죽어서도 홀대하는 이유

2023-09-06     백병훈
[파이낸셜리뷰] 세계사적 격동의 20세기 한 복판에 서있었던 고르바초프가 사망했다. 많은 지성과 양심들은 그를 추모한다. ‘고르비’라는 표현은 고르바초프의 애칭이다. 그에게는 고르비라는 애칭이 더 인간적으로 다가 온다. 1931년 가난한 우크라이나계 러시아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대자연이 선사하는 목가적 시골전원 속에서 가족 간의 우애와 사랑을 온 몸으로 느끼며 성장했다. 어릴 적부터 자연과 함께하고 순응하는 인간성, 인간을 향한 따뜻한 휴머니즘의 세계관이 그를 더욱 고르비 다웁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심성은 훗날 정치과정으로도 이어졌다. 술꾼 아버지로부터 당한 구타와 폭력이 스탈린과 히틀러를 차갑고 냉혹한 권력자의 길로 몰아간 것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소년시절을 그는 고향에서 보냈다. 39살의 젊은 나이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이 된 그는 자신의 출중한 능력과 안드로포프 등 막강한 정치적 후원자들의 지원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사망 이후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를 거쳐 1985년 정부 총서기로 임명됐고, 대망의 소련공산당 서기장, 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의장을 지낸 뒤, 권력에서 밀려난 1990년부터 1년까지는 새로운 대통령직을 만들어 권좌에 앉았다. 그런 전직 대통령 고르바초프의 장례식은 아주 이례적이었다. 장례식은 국장이 아니었다. 푸틴은 참석하지도 않았다.‘세계사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 정치인’이라고만 언급하고는 장례식 전에 미리 개인적으로 조문한 것으로 가름했다. 다만, 필라홀에서 시신을 마지막으로 시민들에게 공개하는 것까지는 허용했다. 그리고 고르바초프는 23년 전, 백혈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라이사의 곁으로 조용히 묻혔다.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였다. 소련 지도자들 가운데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 묻힌 것은 공산당에서 축출됐었던 흐루시초프가 유일했었는데 그 기록이 이번에 깨졌다. 2007년, 푸틴이 자신을 직접 발탁한 옐친 전 대통령 사망 당시 국가 애도일까지 정하고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루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많은 시민들의 추모물결이 이어졌지만 죽어서도 홀대하는 푸틴의 정치적 셈법은 따로 있다. 자신은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노선과 다른 사람이고, 그의 유산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리기 위한 것이다. 푸틴은 왜 그렇게 해야 했을까? 고르바초프 집권말기 소연방공화국들이 앞 다투어 독립을 선언하자 소련공산당 보수파들은 1991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연금했었다. 이에 옐친이 나서서 구테타를 진압하자 실권을 잃은 고르바초프는 그해 12월,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소비에트연방은 해체됐다. 이로서 그는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자 첫 대통령이 됐지만 소련제국의 마지막 날을 장식한 주인공이 됐다. 그 빈 공간을 꿰찬 옐친이 러시아의 대통령이 됐지만 지지율 폭락과 건강이 나빠 1999년 12월 마지막 날 사임했다. 그를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푸틴이었다. 푸틴은 고르바초프를 원망하고 경멸했다. 그도 그럴 것이, 80년대 유가하락으로 소련 경제가 붕괴직전 상태였고, 고르바초프가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변화와 개혁을 심각하게 생각해서 내놓은 개방정책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개혁과 개방은 동유럽 공산당의 일당독재에 반기를 드는 촉매제가 됐다. 그런데 동구공산권이 도미노처럼 무너질 때 군사개입을 거부했던 사람이 바로 고르바초프였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소련의 개입을 정당화했던 브레즈네프 독트린도 폐기시켰다. 아프카니스탄 전쟁에서 공식 철수했고, 1989년,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핵무기를 동결하면서 동서냉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동구라파가 붕괴되고 소련이 해체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을지도 모른다. 노벨평화상이 그에게 수여됐다. 그는 한국과 수교를 단행했다. 북한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올림픽에 소련이 참여하도록 하였고, 1991년에는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젊은 나이에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했던 고르바초프는 같은 공산주의 교리를 신봉하며 살아왔던 모스크바의 지도자들과는 다른“결”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 싹은 1956년 후르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연설에 열광했던 그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냉전을 종식시킨 평화주의자로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소련의 붕괴를 막아내지 못한 지도자라는 낙인은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 배신자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그는 5% 미만의 저조한 득표율을 얻었다. 세계 최강 옛 소련의 위신과 영광만을 생각하는 푸틴은 고르바초프에 의한 소련의 붕괴를“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서방에 맞서‘신유라시아제국’건설을 꿈꾸는 사람이 지금의 푸틴이다. 고르바초프도 생전에 푸틴의 권위주의와 독재를 비판했다. 푸틴과 고르바초프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가늘게 이어져 왔다. 이것이 푸틴이 죽어서도 고르바초프를 홀대하는 진짜 이유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남긴 자유와 평화의 유산은 여전히 러시아에 살아남아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 낼지 모른다. 러시아는 역사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온 전통의 나라다. 러시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릴 것이다. 볼쉐비키혁명 전야의 시대에도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백병훈 약력

건국대학교 비교정치학 박사 국가연구원 원장 프라임경제신문 사장 한국정치심리공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