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9월 30일 ‘바덴바덴’서 88서울올림픽 개최 확정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81년 9월 30일 서독(현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 제84차 총회에서 일본 나고야시를 제치고 서울이 88올림픽의 최종 개최지로 결정된 날이다.
88서울올림픽은 우리나라 민주화를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공산권 국가와의 교류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통상적으로 올림픽은 중진국이 개최를 한다는 점에서 중진국으로 진입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막대한 개최 비용으로 인해 그 손실이 어마어마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88서울올림픽의 성공은 우리에게 중진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박종규에 의해
1979년 4월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세계 여자농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관람을 하면서 박종규 대한체육회장 겸 사격연맹회장에게 올림픽 개최를 지시했다.
박종규는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으로 인해 대통령경호실장에서 물러났고, 사격연맹 회장으로 활약을 했다.
박종규로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것이 올림픽 개최라는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했다.
박종규는 계속해서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것은 전세계에 중진국으로 진입했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득을 했고, 결국 이날 박 대통령이 박종규 회장에게 올림픽 유치를 지시하게 됐다.
10.26 사건으로
그런데 10.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정치적 혼란에 빠지게 됐고, 올림픽 계획은 표류하게 됐다.
이에 정권을 인계 받은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1월 19일 ‘올림픽 유치 포기’를 선언했다. 그리고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면서 모든 공직에서 추방됐다.
그런데 서울의 봄이 도래하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민주화 바람이 불자 전두환 신군부는 새로운 돌파구 마련이 필요했다.
전두환은 일본 우익세력을 연결하는 세지마 류조 이토추 상사 부회장을 극비리에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1964년 도쿄올림픽, 1970년 오사카 엑스포 등을 예로 들면서 거대 이벤트를 유치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라고 조언했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사활을 걸기 시작했다. 1980년 11월 30일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ioc에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냈고, 12월 2일 접수를 완료시켰다. 1981년 1월 6일 KOC가 올림픽 유치계획을 위한 실무반을 편성했다.
난색 보인 서울시
하지만 서울시가 난색을 보였다. 왜냐하면 2조원의 예산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남덕우 국무총리는 ‘올림픽 망국론’을 제기했다. 그러자 여론도 부정적으로 돌아섰다. 경제관료, 전문가, 기업인들이 난색을 표했다.
게다가 공산권 국가가 유치 반대를 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리면서 더욱 부정적인 여론이 발생했으며, 전두환 정부가 반민주적이고 정통성 없는 독재정권, 12.12 군사반란, 5.17 내란과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등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유치가 더욱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하지만 전두환은 ‘일단 하고 보자’라면서 노태우 당시 정무장관을 전면에 내세웠고,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인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노태우는 전두환 후계자라는 것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서 올림픽 유치가 더욱 절실했다. 그러면서 정주영 회장에게 더욱 압박을 가했다.
훗날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가 올림픽 유치는 자신의 공이라고 주장하면서 정 회장의 심기를 건드렸고, 정 회장이 정계에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자만에 빠졌던 일본
당시 일본은 당연히 나고야 올림픽 유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고야 시민들과 일부 시민단체는 올림픽 피로감이 상당했다. 그러면서 올림픽 유치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았다. 북한이 머리 위에 있었기 때문에 올림픽 유치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안보가 불안한 나라에서 국제스포츠경기를 치른다는 것이 IOC 위원들에게는 가장 큰 고민이었다.
게다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은 남아공 흑인 인종차별 문제 때문에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이 보이콧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서방권이 대거 불참하면서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공산권 국가의 불참이 예고돼 있었고, 실제로 불참했다.
이런 가운데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한다면 공산권 국가의 불참이 두 차례 연속 이뤄지게 되기 때문에 IOC 위원들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승산 없었던 유치전
그야말로 유치전은 승산이 없었다. 나고야가 몇 표를 얻어 승리를 하느냐에 관심이 집중됐었다. 서울은 3표가 나오면 많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그 3표라는 것이 한국, 미국, 대만이다.
그런데 정 회장의 뚝심이 발휘가 됐다. 바덴바덴에서 유치전이 이뤄지는 도중 영국으로 날아가 영구 IOC 위원들과 식사를 했다. 이때 영국 IOC 위원 한 사람이 정 회장에게 “체육계에서 얼마나 일했는가”라고 물었고, 정 회장은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처음 일하는 것”이라는 대답했다.
위원은 초보자를 내보냈다면서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정 회장이 “일본은 이미 올림픽과 같은 엄청난 세계적인 행사들을 개최한 이후부터 엄청난 경제 대국으로서 발돋움하고 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데 만약 이번에도 유치한다면 일본의 경제발전을 더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고 발언했다. 영국에게 일본 견제심리를 작동하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영국은 일본과 경제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올림픽을 유치하면 날개를 달아준 격이라는 것으로 견제 심리를 작동하게 한 것이다.
개최지 결정 당일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었다. 문제는 일본 측 프레젠테이션 연사가 일본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는 것이다. 영어를 못했지만 당시 한국측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이것이 IOC 위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일본의 나고야시를 52 대 27로 꺾고 결국 최종 개최지로 결정됐다. 특히 득표수에서 무려 52 대 27이라는 상당히 놀라운 결과가 나왔는데 특히 공산권 국가들이 일본 나고야 대신 서울을 선택했다.
결정적인 원인은 스포츠 용품업계 ‘아디다스’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은 브랜드로 ‘미즈노’와 ‘아식스’를 밀면서 아디다스로서는 일본 나고야를 선택할 경우 미즈노와 아식스가 성장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서울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IOC 위원들의 표심을 자극했다.
2개월 후인 1981년 11월 26일,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의 개최까지 확정, 2년 간격으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연속으로 치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