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가별초 그리고 안변책
2023-09-07 어기선 기자
전주에서 삼척으로, 삼척에서 동북면으로 이동하면서
원래 원 간섭기 목조 이안사를 따라 전주에서 삼척으로, 삼척에서 동북면 의주(원산)으로 이주를 하면서 가호의 후손들로 가별초가 꾸려졌다. 따라서 아무리 많아야 수십명에 불과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성계 장군이 개경 탈환전, 함흥평야 회전, 황산대첩, 기주 전투, 제1차 요동정벌, 나하추 전투, 호바투 침입 등을 통해 수많은 전과를 올리면서 가별초 집단 규모가 점차 커져갔다. 실제로 동북면으로 이주했을 때 동행했던 숫자가 170여호였다. 이것이 호바투와의 전투에서 전투병력만 2천여명의 규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무신정권 당시 경대승의 사방집단인 도방이 100여명이었는데 다른 무신들이 경대승을 두려워했다고 할 정도이니 사병 집단의 규모가 적었다. 최충헌의 경우에도 1천명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이성계 장군은 2천~3천명의 사병 집단을 만들었으니 엄청난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호바투와의 전투가 끝나면서 가별초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성계 장군으로서는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할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안변책 제시
1383년 8월 이성계 장군은 호바투와의 전투 이후 우왕에게 안변책을 제시한다. 혹자들은 안변책은 정도전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이성계 장군과 정도전의 만남은 그 이후이기 때문에 안변책은 이성계 장군의 독자적인 생각이다. 내용은 평시에도 백성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외인들의 침략에 대비하는 것, 관할 지역에서 세금으로 군량을 자급할 수 있게 해줄 것 등이 담겨있다. 고려 조정 입장에서 자치권을 이성계 장군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에 꺼릴만 하지만 안변책을 수용한 이유는 동북면의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북면이 무너지면 그에 따라 곧바로 개경(송악)으로 외적이 침입하기 때문에 안변책을 통해 동북면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가별초의 경제적 기반으로
결국 안변책이 수용되면서 이성계 장군은 가별초를 더욱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됐다. 경제적 기반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는 가별초의 위력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게다가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이성계 장군은 다른 군벌에 비할 바가 못되게 됐다. 여기에 정도전, 조준 등 급진파 신진사대부가 합류를 하면서 이성계 장군은 조선 건국의 동력을 얻게 됐다. 이성계 장군은 무력으로는 ‘가별초’, 머리로는 ‘신진사대부’,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안변책’을 통해 조선 개창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