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윤필용 사건

2023-09-07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70년대 ‘윤필용 사건’ 당시 고문에 시달리다가 강제 전역한 황진기 전 육군 대령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판단한 원심에 대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7일 황 전 대령과 그의 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황 전 대령은 윤필용 사건으로 보안수사관실로 소환돼 고문과 폭행을 당한 뒤 전역 지원서를 써 내 그해 4월 20일 전역 처분됐다. 그는 2016년 12월 전역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해 이듬해 무효 판결을 확정받았다. 이후 공무원들의 불법행위로 인해 정신적인 손해를 입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4억4천만원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박정희 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

윤필용 사건은 1973년 4월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인 윤필용과 육군 장교 13명이 쿠데아 모의 혐의로 숙청 당한 사건이다. 말실수 하나로 인해 벌어진 어이없는 사건이지만 박정희 정권이 어떤 식으로 권력을 유지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윤필용은 5.16 쿠데타 이래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가장 신뢰한 군부 인사이다. 하지만 1.21 사태 당시 윤필용은 방첩대장이었는데 김신조의 ‘박정희 모가지’ 발언으로 인해 심기가 불편한 박정희 대통령이 윤필용을 좌천시키고 김재규를 앉힌다. 김재규는 방첩대를 보안사령부로 격상시키면서 군부의 실세로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윤필용을 버릴 수 없었고, 이에 수도경비사령관에 앉히면서 또 다시 실세가 됐다. 이로써 김재규와 윤필용이 서로 견제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김재규는 윤필용을 견제하기 위해 1971년 6월 수경사령관실에 통신 감청을 실시하게 되고, 이것이 발각되면서 김재규는 보안사령관에서 3군단장으로 좌천되고, 보안사령관에 강창성이 부임한다. 김재규가 실각되면서 사실상 군부 1인자는 윤필용이 됐다. 그런데 1972년 가을 윤필용은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게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노쇠했으니 그만 물러나시고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과 골프를 치다가 “항간에 내 후계자 소문이 돈다던데 자넨 누군지 아나?”라고 추궁했다. 신 사장이 대답을 하지 않자 박종규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은 신 사장 머리에 총을 겨눴고, 결국 윤필용 이름을 댔다. 마침 청와대에 통일정사를 짓는데 이것이 이후락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우해 수경사에서 짓도록 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대노해서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철저한 수사를 지시하도록 했다.

권력의 견제, 그것은 권력의 종말로

윤필용 사건으로 그야말로 별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문제는 이들의 쿠데타 모의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보안사에서는 업무상 횡령, 수뢰,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군무이탈 등 8개의 죄목을 적용해 윤필용을 비롯해 장교 10여명을 1~15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당시 윤필용의 참모장이 손영길이었다. 전두환과 함께 하나회를 결성한 핵심 인물이었다. 그런데 윤필용 사건으로 손영길이 날아가면서 하나회를 전두환이 접수하게 됐다.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 대통령경호실, 수도경비사령부, 보안사령부 등으로 권력을 나눠 서로 견제하게 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이후락, 대통령경호실장 박종규,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보안사령관 강창성이었다. 그런데 윤필용이 날아가면서 권력은 중정, 경호실, 보안사로 좁혀졌다. 그리고 10.26 사건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는데 차지철과 김재규가 날아가면서 전두환이 사실상 권력 1인자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