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9월 13일 법원의 날
2023-09-13 어기선 기자
사법권 빼앗긴 대한제국
대한제국은 1909년 7월 12일 일제와 ‘한국의 사법 및 감옥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한다’는 이른바 기유각서를 체결했다. 이에 같은 해 10월 31일 대한제국의 재판소 모두를 폐지하고 통감부재판소에 사법권을 이양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재판을 받을 수 없다면서 저항을 했지만 일제는 기유각서를 내세워 사법권을 행사했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르거나 사망해야 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지만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조선총독부 통치하의 사법제도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했다. 1946년 3월 29일 미군정법령 제64조에 의하여 현재와 같은 3권 분립 형태의 사법부(司法机关府)가 아니라 부처로서의 사법부가 설치됐다. 이후 미군정은 1948년 5월 4일 군정법령 제192호로 과도 법원조직법을 공포햐 법원행정을 사법부(民事部)에서 대법원으로 이관했다. 이때 사실상 사법 업무가 행정부로부터 독립되었으나, 이는 여전히 미군정청 산하의 기구라는 한계가 있었다.7월 17일 제헌헌법 제정
이후 1948년 제헌헌법이 제정되면서 사법부가 3부 기관으로 자리매김을 했고, 같은 해 8월 5일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대법원장으로 과도정부의 사법부장이던 김병로를 지명해 같은 날 국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김병로를 대법원장에 앉히지 않으려고 했지만 국무회의에서 “대법원장은 김병로 밖에 없다”고 만장일치로 가결해서 임명하게 됐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무런 빚이 없었던 김병로는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판결을 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미군정의 사법권 이양 승인을 받지 못해 취임하지 못한 채 중앙청 사법부장실에서 근무하고, 서소문 대법원 청사에는 과도정부하의 김용무 대법원장이 근무하는 상황이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후 그해 8월 16일부터 9월 11일까지 권한 이양에 관한 한미회담이 개최됐고, 그 결과 그해 9월 13일 ‘대한민국 대법원은 과도정부법원과 그 소속기관을 인수한다’는 내용의 대통령령 제3호(남조선과도정부기구의 인수에 관한 건)가 공포됐다. 이에 사법권을 이양받게 됐다. 그리고 같은 날 초대 대법원장이 취임했으며 이로써 광복 이후의 과도기를 거쳐 독립된 사법부가 실질적으로 설립됐다.삼권분립 완성
그해 7월 17일 제헌헌법이 제정되면서 입법부가 완성됐고, 그해 8월 15일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면서 행정부가 탄생했다. 하지만 사법권은 아직도 미군정에 있으면서 삼권분립이 완성되지 못했는데 이날 미군정이 사법권을 이양하면서 삼권분립이 완성됐다. 더욱이 김병로가 초대 대법원장을 맡으면서 실질적인 삼권분립이 완성됐다는 평가다. 김병로는 앞서 언급한대로 이승만 대통령이 임명한 것이 아니라 국무회의서 만장일치로 가결했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판결을 할 수 있었다.더욱이 오늘날 우리나라 법학 체계를 완성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김병로이다. 가령 민법의 신의 성실과 권리남용, 물권 변동의 형식주의 등은 모두 김병로 손에서 나온 것들이다. 형법에서는 사회 상규, 부작위범, 인과관계, 피해자의 승낙, 간접정범, 실패한 교사, 자격정지,선고유예, 몰수 등이 대표적이다. 법정 좌석 배치에도 일제시대 판사와 검사가 나란히 앉은 것을 검사를 끌어내려 지금은 검사와 변호사가 마주보게 좌석 배치를 했다. 사실상 오늘날 법원의 모습을 김병로 선생이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