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9월 16일 명량해전 승리

2023-09-16     어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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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597년 9월 16일(음력)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울돌목)에서 왜군을 맞아 승리한 명량해전 승리의 날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함대가 왜군에게 박살이 났고, 배설이 12척의 배를 가지고 도망을 쳤다. 사실상 조선 수군이 궤멸됐다. 그러자 선조는 급하게 백의종군을 하고 있던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그때 선조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다면서 이순신 장군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 교서를 살펴보면 임금이 신하에게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소위 반성문(?)의 내용이 엿보인다. 그만큼 조선은 누란지위에 놓인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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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없었던 이순신 장군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7월 18일 이덕필과 변홍달이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패전했다는 소식을 이순신 장군에게 알려왔고, 이순신 장군은 망연자실하고 통곡했다. 그리고 도원수 권율이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을 찾았는데 이순신 장군은 해안지방을 돌면서 방책을 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서를 받았는데 장소가 진주 굴동에 있는 손경례의 집이었다. 그리고 8월 3일 손경례 집에서부터 출발을 하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은 말을 타고 구례로 향했다. 석주관성에 도착을 했는데 많은 이들이 피난을 간 탓에 경내가 쓸쓸했다고 기록돼있다. 8월 4일 이순신 장군은 곡성현청에 도착했지만 역시 백성들이 피난을 갔고, 경내는 비어있었다. 8월 5일에는 옥과현으로 이동했는데 많은 백성들이 몰렸다고 기록돼 있다. 8월 8일 지금의 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 위치한 부유창에 도착했다. 창이란 조세로 받은 쌀이 보관하는 곳을 말하는데 부유창이 이미 잿더미가 돼있었다. 즉, 식량을 구하지 못했다. 8월 9일 순천을 지나 보성 조양창에 도착했다. 조양창은 부유창과 달리 군량이 온전히 보전돼 있었다. 조양창은 지금의 보성군 조성면에 있는 고내마을이다.

보성에 오래 머물렀던 이순신 장군

이때부터 이순신 장군은 장거리로 움직이지 않고 주로 보성에 머물렀다. 8월 11일 박실마을에 있는 양산항의 집으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은 4일간 머물렀다. 8월 15일에는 열선루에서 선전관 박천봉이 선조의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조선 수군을 폐지하고 육지에 합류해 싸우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장계를 쓰게 된다. 8월 18일 배설로부터 12척의 배를 인계 받고, 8월 20일까지 계속 보성에 머물렀다. 보성에 머문 이유는 바로 조양창 때문이다. 즉, 군량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를 육지로 옮길 수 없기 때문에 배설로부터 12척의 배를 인계 받으면서 군량을 해남의 벽파진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9월 16일 명량해전을 통해 승리를 하면서 제해권을 다시 탈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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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에서 보성까지

이순신 장군이 이처럼 곡성에서부터 보성까지 육로를 통해 계속 남하를 했던 것은 군량과 무기를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보성으로 내려가서 배설로부터 12척의 배를 인계 받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순신 장군은 그러하지 않고 곡성에서부터 보성까지 훑어내려가는 방식을 사용했다. 더욱이 난중일기를 보면 곡성에서 보성까지 내려가는 동안 계속 토사곽란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고문의 후유증도 있었겠지만 이순신 장군은 고질적으로 소화기 계통이 좋지 않았다. 따라서 환자이기 때문에 진주 굴동에서 곧바로 보성으로 향하면 될 문제였지만 이순신 장군은 북쪽인 곡성에서부터 보성까지 남하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군량’ 때문이었다. 사실상 아무 것도 없는 빈손이었던 이순신 장군이었기 때문에 군함 12척을 배설로부터 인계 받는 것보다 중요했던 것은 군량과 무기의 확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조양창에서 군량을 확보하면서 보성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