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김유신 장군의 쌀 배달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661년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사망을 했다. 신라인들은 국상의 슬픔에 잠긴 상황인데 당나라 황제 고종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사신이 가져온 내용은 자신들이 고구려를 칠테니 신라도 고구려를 공격하라는 내용이었다. 신라가 국상 중이었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신라 군대를 동원하라는 내용이었다.
무열왕의 뒤를 이은 문무왕이 등극하면서 당나라 황제는 다시 특사를 파견했는데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칠테니 신라는 군량미를 제공하라는 내용이었다.
전투의 양상이 바뀌다
이는 당나라의 전투 양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이 중원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는 대규모 군대를 보냈다. 그러면서 보급부대도 함께 보낸 것이다.
수나라 문제와 양제 역시 대규모 군대를 보낼 때 보급이 문제였다. 612년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가장 고민거리가 보급이었다. 이에 우중문·우문술 장군에게 30만명의 별동대에게 100일치 식량을 짊어지고 평양성을 진격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평양성에 도달한 이들은 평양성을 함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후퇴를 하던 과정 속에서 살수에서 을지문덕 장군에게 대패하고, 2300여명만 돌아갈 수 있었다. 살수대첩이다.
그리고 당나라로 바뀌고 이세민이 이끈 당나라 부대가 안시성에서 패퇴를 한다. 이때도 대규모 군대를 동원했고, 역시 보급부대가 뒤를 따랐다.
그런데 661년 당 고종은 신라에게 군량미를 대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것은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을 것을 의미한다.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20만 군대가 백제를 침략했을 때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 부대가 백제로 진격을 했다. 그 이유는 20만 군대의 군량미를 보급하기 위해서이다.
20만 군대가 서해를 지나 백제로 상륙해야 했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군량미를 준비할 수 없었다. 이에 신라에게 군량미를 보급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때 승리한 것을 경험한 당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 전투의 양상을 바꾼 것이다. 자신들은 군사를 내어주고, 신라에게는 군량미를 보급하게 한 것이다.
쌀 배달꾼 조롱 받은 김유신
662년 신라군은 김유신 장군 등의 지휘 하에 쌀 8천가마니를 포함해 5만 2천가마니의 군량미를 20대의 수레에 싣고 평양을 향해 간다.
당시 김유신 장군도 평양성을 향해서 진격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험악한 산악을 지나야 하고, 생소한 황해도와 평안도를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당나라 진영에 도착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편에는 당나라 사령관 소정방이 군량미를 받자마자 전쟁을 끝내고 돌아갔다고 기록돼있다. 당나라 군대가 쌀만 챙긴 것이다.
결국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도 철군을 할 수밖에 없는데 철군 과정에서 고구려군을 만나 전투를 했고, 대승을 거뒀다.
소모전 양상으로
이때부터 당나라는 대규모 전투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 전투를 치르는 소모전 양상으로 바뀌었다
계속해서 고구려를 침공했고, 그때마다 신라군은 쌀 배달을 해야 했다. 당나라 입장에서는 소모전을 치르는 것이기 때문에 군사의 손실이 크지 않았고, 식량 역시 신라에서 보급을 받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크게 손실을 입지 않았다.
반면 고구려는 자신의 땅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기 때문에 농사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더욱이 전투를 치를 때마다 들판의 곡식을 모두 태워버리는 ‘청야전술’을 사용했다. 즉, 고구려는 경제적 손실이 계속 눈덩이처럼 쌓여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고구려가 연개소문 사후 그 자식들 간의 정치적 다툼이 고구려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소모전 앞에서 경제적 손실이 계속 되는 것은 결국 고구려를 멸망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