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벽골제

2023-09-22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벽골제는 전북 김제에 있다. 김제의 옛지명이자 마한의 구성국이었던 ‘벽비리국’에서 벽골제라는 어원이 나왔다. 벽골제는 최고(最古)의 저수지 둑으로 ‘호남(湖北)’이라는 명칭이 벽골제 남쪽에 있는 땅이라는 뜻으로 ‘호남’이라는 명칭이 나왔다. 그만큼 벽골제는 ‘호남’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이면서도 호남평야가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벽골제 때문이다.

백제 비류왕 시절

벽골제는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에 축조됐다고 기록돼 있다. 둑의 길이는 1800보 규모였다. 이후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년) 증축을 했고, 고려 현종, 12세기 초 인종, 15세기 초 조선 태종 재위기 등 4차례 걸쳐 개축했다. 세종 2년(1420년) 홍수로 무너졌다. 일제강점기 1925년에 동진수리조합이 농지관개용 간선수로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일부 훼손되었는데, 1975년에 복원해 일반에 공개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등 5개 수문이 있었다고 기록됐으나 현재는 장생거와 경장거 2개소만 남았다. 벽골제 유적지에 있는 수문은 장생거다. 2012년에 중심거, 2020년에는 제 1수문(수여거)로 추정하는 유적이 발견됐다.

지평선 축제

벽골제는 매년 가을이 되면 지평선 축제를 연다. 이는 1999년부터 시작됐는데 드넓은 지평선과 어우러져 김제의 전통 벼농사 문화 등을 알리는 이벤트가 있다. 그러던 것이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전국 단위 축제로 발돋움하게 됐다. 벼농사를 테마로 해서 축제까지 만들어 내고 이것이 전국 단위를 넘어 세계에서 관심을 갖는 축제 중 하나가 됐다는 점에서 상당한 특색이 있다. 그것은 만경평야의 쌀 생산량 때문에 가능하다. 호남은 그야말로 평야지대라서 쌀 생산량이 상당하다. 경상도는 산악지대라서 천석꾼이면 부자 소리를 듣지만 호남에서 천석꾼은 부자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이다.
사진=연합뉴스

저수지 아닌 방조제 역할?

일각에서는 벽골제가 저수지가 아니라 방조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이론을 내놓고 있다. 이영훈 전 교수는 2007년 계간지 ‘시대정신’ 여름호에서 벽골제는 농업용 저수지가 아니라 바닷물의 침입을 막는 방조제 역할을 했다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김제·만경평야 지대는 1900년대까지도 대부분 황량한 불모의 땅이었으며, 러·일전쟁 이후 들어온 일제가 간척사업과 수리사업을 전개하면서 농업지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허수열 전 충남대 교수가 2012년 1월 자신의 저서 ‘일제 초기 조선의 농업-식민지근대화론의 농업개발론을 비판한다’에서 삼국유사, 조선옹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 김제 일대 수리조합·토지개량·하천개수 등의 사료를 제시하면서 벽골제는 저수지로 설립됐으나 저수지로 가능한 것은 극히 일부 기간에 불과했고, 세종 때부터 일제초까지 제방 일부가 파괴된 채 방치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김제나 만경평야가 일제의 개발 이전에도 조수의 침입에서 비교적 안전한 농업지대였으며 일제의 개발에 의해 비로소 농업지도로 변모한 것은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그러자 이 전 교수는 2013년 ‘경제사학’(53호)에 발표한 논문 ‘혼란과 환상의 역사적 시공-허수열의 일제 초기 조선의 농업에 답한다’에서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벽골제를 저수지로 본다면, 오늘날 춘천 소양강댐보다 10배는 더 큰 면적이 나오는데, 4세기 초반에 그런 저수지를 만들어 대규모 간척사업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럽에서도 간척사업이 활성화되는 것은 13세기에 와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근대 이전 기록을 사료비판 없이 맹신해선 안 된다. 4세기 초 한반도 인구는 200만∼300만 명 수준이고, 아직 석기를 사용하고 움집에서 살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규모 농업용 저수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