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중동건설 붐 그리고 제비족
2023-09-27 어기선 기자
오일쇼크 그리고 중동건설 붐
1970년대에는 1차·2차 오일쇼크가 일어났다. 특히 1979년 이란 혁명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2차 오일쇼크가 일어났다. 이런 1차와 2차 오일쇼크는 이른바 오일머니가 생겨났다. 오일머니가 중동국가에 넘쳐나면서 중동국가들은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거대 건설 사업이나 수로, 항만사업에 상당히 많은 투자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중동 건설붐이 일어났다. 당시 미국이나 유럽 그리고 일본의 건설 노동자의 임금은 상당히 높아진 반면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건설 노동자의 임금은 낮았다. 반면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은 각종 대규모 공사를 맡은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중동국가 입장에서는 우리나라 건설회사들과 계약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1975년 7억 5천만달러에 불과했던 건설 수주액이 1980년 82억 달러로 10배 이상 늘었다. 우리나라 외화수입액의 85.3%가 오일달러이다. 건설 수주액이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중동국가에 보내야 할 건설 노동자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5년 6천명이었던 것이 1978년 10만명에 육박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남성들 중에는 중동 건설 현장에 몇 년 갔다 오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건설 노동자로 취업을 했다.국내에서는
우리나라 남성들이 건설 노동자로 중동국가에 몇 년 나가 일을 하면서 제비족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중동으로 간 남편들이 보내온 수입이 기존 보다 넉넉해지면서 주부들 중이 극히 일부는 향락에 빠지게 됐다. 1950년대 댄스홀이 유행을 했다면 1970년대까지 고고장이 유행을 했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카바레가 유행이 됐다. 가정형편이 좋아진 유부녀들이 장바구니를 들고 카바레로 출입하는 경향이 많아지면서 제비족들이 카바레에 상주를 했다. 그러면서 유부녀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금품을 갈취하기에 이르렀다.대대적인 단속으로
제비족이 출현하면서 정부는 대대적인 단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중동 노동자들이 제비족으로부터 부인을 지켜달라는 탄원서가 신문사와 정부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결국 제비족을 사회악으로 규정해 단속에 나섰고, 건설사들은 ‘가정보호 전담부서’를 설치하고 건설 노동자 부인들을 관리하고 나섰다. 건설 노동자 부인들을 관리하는 것은 본사 상담직원이 부인들을 만나서 “사막에서 고생하는 남편을 두고 이럴 수 있느냐”는 설득작업이었다. 그리고 본사 상담직원들은 부인들에게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육성 녹음 테이프를 받아서 건설 노동자에게 보내는 일을 했다.제비족의 어원이란
제비족이라는 어원은 주로 일본어의‘(若(わか)い)つばめ(제비족. 연하의 내연남)’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또 다른 설은 조선시대의 ‘잽이’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리판의 북잽이, 장고잽이처럼 춤을 잘 춘다고 해서 ‘춤잽이’에서 왔다는 이야기다. 춤추는 사람들이 입은 연미복이 제비 꼬리와 비슷해서 제비 같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제비족이 1990년대 들어서면서 중동 건설붐이 다소 약화되자 아이러니하게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성을 유혹해서 금품을 뜯어내는 제비족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