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Hi스토리] YH무역

2023-10-12     전완수 기자
[파이낸셜리뷰=전완수 기자] YH무역은 1966년 설립된 회사로 한때 재계 15위를 기록할 정도로 고도 성장을 한 기업이다. 하지만 점차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사양산업으로 치닫게 됐다. 그러면서 YH무역 사건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종언을 고하는 사건이 됐다. YH무역은 회사 자체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과 연결되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오늘날에도 YH무역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노동운동의 역사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공의 핵실험 때문에

1964년 10월 중공은 핵실험을 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중국산 원료를 사용하는 가발의 수입을 금지했다. 미국 가발시장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중국산 가발이 사라지게 되면서 갑자기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 가발시장의 90%가 중국산 가발이었기 때문이다. 뉴욕 한국 무역관 장용호 부관장은 이번 기회에 왕십리에 공원 10명 규모의 작은 가발 공장을 1966년 차렸다. 사명은 이름의 영문 첫글자를 따서 YH무역이라고 지었다. YH무역은 무주공산의 미국 가발시장을 빠르게 점령해갔다. 우리나라 가발이 중국산에 비해 품질이 우수했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산 가발은 중국인의 머리카락을 이탈리아에 팔았고, 이탈리아에서 제조했기 때문이다. 가발 제조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꼼꼼한 바느질이다. 그런데 서구유럽에 비해 아시안 사람들이 바느질 솜씨가 더 좋았다. 이에 YH무역에서 생산한 가발이 미국 시장을 빠르게 점령해 나갔다. 그러면서 설립 4년 만인 1970년에는 공장 규모 노동자 4천여 명으로 증가하고 철탑산업훈장까지 받았다. 그리고 한때 재계 15위를 기록했다.

동남아 급부상

하지만 베트남 전쟁이 끝나면서 동남아가 정치적 안정을 취하게 됐고, 동남아에서 생산한 가발이 미국 시장을 점차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발산업의 사양을 의미한다. 장용호 사장은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 자산을 미국에서 외상 수입하고 갚지 않는 방식으로 빼돌렸다. 사주가 앉힌 대리인은 무리한 사업 확장에 실패한 끝에 임금이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YH무역은 1979년 3월말 ‘4월 말에 폐업한다’는 공고문을 붙였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사주가 재산을 빼돌리고 위장폐업을 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노조가 파업을 하는 등 항의를 했지만 폐업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자신들이 여공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판단하면서 여공들은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게 됐다.

신민당 당사로

노조는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는데 회사 측이 기숙사의 물과 전기 공급을 끊어버리자 8월 9일 농성장을 옮겼다. 그곳은 바로 신민당 당사였다. 당시 야당 당사를 점거한 것이다. 김영삼 당시 총재는 이들을 받아주고 정부부처에게 고용 승계와 전직, 회사 정상화 등의 대안을 타진했었다. 하지만 정부의 입장은 강경했다. 박정희 정권은 신민당을 비난하고 나섰다. 신민당이 노사 갈등을 조장한다는 비난을 가했다. 그리고 10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대책회의에서 강경하게 조치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10일 밤 10시 40분 여공들은 긴급 총회를 열고 ‘죽음으로 맞서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때 김영삼 총재가 “내 이름 석 자와 신민당의 이름을 걸고 조속히 여러분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시키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11일 새벽 경찰은 강경진압에 나섰다. 김영삼 총재와 의원들이 인의 장막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경찰은 총재실 벽을 부수고 김 총재를 끌어내렸다. 의원들도 끌어내리면서 경찰은 본격적으로 여공을 끌어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씨가 1층에 쓰러진 채로 발견됐고, 곧바로 병원에 실려갔지만 새벽 2시 30분 사망했다. 미국 국무부가 8월 14일 이 같은 사실을 알고 “한국 경찰의 지나치고 잔인한 폭력 사용을 개탄하며 적절한 문책을 바란다”는 이례적인 대변인 논평을 냈다. 박정희 정부는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했지만 미국 국무부는 “미국은 과거 소련이 유대인을 괴롭힐 때도 비슷한 논평을 낸 적이 있다. 내정간섭이 아니다”고 밝혔다. 김영삼 총재는 뉴욕타임스 9월 16일자 인터뷰에서 “카터 행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소수 독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끝내라”며 “미국이 점점 더 국민으로부터 소외된 독재 정권이냐, 아니면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다수냐를 분명하게 선택할 시점이 왔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 발언을 문제 삼고, 결국 국회의원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제명 처리를 했다. 그리고 한달도 안돼 10.26 사건이 발생했다.

장용호는

이 사건이 있을 후 장용호 사장은 미국으로 떠나 뉴욕한인회장을 역임했다. 훗날 김영삼 총재가 대통령이 된 이후 청와대에서 뉴욕한인회장 자격으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났다. 장 사장이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자신을 부정부패의 장본인이라 한 점에 대하여 항의했고, 김영삼 대통령이 그에 대해 사과했다고 주장했으나 사실 여부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