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사직

2023-10-14     어기선 기자
사진=문화재청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사극에서 왕 앞에 있던 신하들이 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소서”이다. 종묘는 역대 국왕들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유교 사당을 말한다. 사직(社稷)은 토지와 곡식의 신을 말한다. 종묘사직은 성리학 국가 즉 조선의 근간을 말한다. 그 근간을 보존하는 것이 ‘왕’ 즉 임금의 역할이다. 종묘는 조선의 ‘얼’을 지키는 것을 말하고, 사직은 조선의 경제 즉 농경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신하들이 “종묘사직을 보존하소서”라고 하는 것은 조선의 얼과 경제를 지켜달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사직이란

사직은 주나라 때부터 시작된 제사이다. 토지와 곡식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하고, 유교국가 특히 농경국가에 있어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가 바로 사직이고, 그것을 행하는 장소가 사직단이다. 사직은 삼국시대 때부터 시작했다고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에 사직과 그의 땅에 있는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고구려에는 왕궁 왼편에 큰 집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으며, 겨울에는 영성과 사직에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돼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 6대왕 성종에는 “토지의 신은 땅이 넓어 다 공경할 수 없으므로 흙을 모아 ‘사(社)’로 삼아 그 공에 보답하고자 함이요. 곡식의 신은 곡식이 많아 널리 제사를 드릴 수 없으니 ‘직(稷)’신을 세워 이를 제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삼국시대나 고려가 유교국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직을 중요시하게 여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국가는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토지와 곡식은 중요하다. 그것을 신격화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기 때문에 사직은 고대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진=문화재청

한양 천도하면서

사직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더욱 중요한 것으로 취급됐다.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삼고 경복궁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세웠는데 이는 ‘주례 고공기’편에 적힌 ‘좌묘우사’를 따른 것이다. 그리고 사직단에는 토지의 신인 ‘사’와 곡물의 신인 ‘직을 모시는 단이 따로 있다. 그리고 왕과 왕세자가 제례를 준비하는 장소와 제례 음식을 준비하는 공간이 따로 있다. 사직은 임금만 제례를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 지방 수령들도 사직을 할 수 있었다. 이는 각 지역의 토지와 곡물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현재도 각 지방마다 사직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부산 ‘사직구장’이 대표적인 장소이다. 일제강점기 때 이런 사직이 일제 때부터 사직제례를 폐지하고 정원과 산책로를 조성해 공원으로 바꿨다. 이런 이유로 이때부터 ‘사직공원’이라고 이름을 명명하기도 했다. 또한 사직단에 사직터널을 뚫는 등 그야말로 사직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훼손시키는 일을 단행했다. 이는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것 중 하나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종묘사직’은 조선의 정신과 경제를 지키는 것이 된다. 따라서 사직을 훼손하는 것이야말로 일제강점기의 ‘조선 역사 지우기’ 중 하나가 된 셈이다. 이후 해방이 되고 사직단은 1985년이 돼서야 복원사업을 통해 오늘날 모습을 찾게 됐고, 2000년 10월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