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0월 17일 10월 유신 단행

2023-10-17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72년 10월 17일 헌정 중단 사태인 10월 유신이 단행됐다. 흔히 제4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유신 체제를 ‘한국식 민주주의’라고 포장했다. 하지만 대통령에 의한 친위 쿠데타이면서 역사의 오명을 남긴 사건이었다. 이런 10월 유신은 1979년 YH무역 사건이 터지면서 김영삼 제명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부마 항쟁이 벌어졌으며, 10.26 사건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3선 개헌의 무리수

1969년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을 단행했다. 하지만 3선 개헌은 너무나 많은 무리수를 안고 있었다. 그 이유는 4.19 혁명을 겪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상당한 표차로 당선이 됐다. 이에 정치권 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임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4.19 혁명을 겪은 사람들로서 설마 장기집권을 하겠느냐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는 여권도 마찬가지였다. 1969년 3선 개헌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정구영 전 총재를 비롯해 김용태, 예춘호, 양순직, 박종태, 김달수, 이만섭 등은 3선 개헌에 반대를 했다. 이에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이들은 협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의지를 꺾지 않으면서 결국 조건부 3선 개헌을 추진하게 됐다. 그 조건은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해임이었다. 김 부장의 무지막지한 철권통치에 학을 뗀 여당 의원들이 반대에 나선 것이다. 그러자 김 부장은 이만섭 의원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김 부장에게 “이만섭에게 무슨 일 생기면 내가 너를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결국 3선 개헌까지 했다. 그러면서 3선을 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그 이상을 연임한다는 것이 이제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 또 정권을 연장하겠다고 하면 여당 내부에서도 반발이 극심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률 저조

또 다른 문제는 경제성장이었다. 1971년 1분기부터 1972년 2분기까지 경제성장률 정체를 기록한다. 박정희 정권하면 떠오르는 수직적 고도 성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래프인 셈이다. 이는 농업과 공업,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불균형에 따른 이중 구조의 심화, 자본 시설재나 원자재의 지나친 해외 의존, 금융 비용 및 원리금 상환 부담 가중 등으로 인해 구조적 불황이 발생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박정희 정권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수직적 고도성장인데 그것을 이뤄내지 못하면서 국민들이 박정희 정권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슬슬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 터져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40대 기수론 등장

여기에 야당은 김영삼·김대중 등 40대 기수론과 진산 파동 등으로 인해 정치 혁신을 거듭하고 있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이미 노쇠한 대통령이고 40대 젊은 정치인들이 대선판을 뛰어들었기 때문에 야당에 국민적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실제로 6대 선거에서 116만표의 표차이를 보였는데 7대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표차가 95만표가 됐다. 그야말로 정치적 위협이 된 것이다. 다음에 선거를 한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표차이였다.

닉슨의 주한미군 철군 통보

또 다른 원인은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5년 안에 주한미군 철수를 통보했다. 그리고 주한 미 7사단을 일방적으로 철수시켰다. 여기에 1972년 닉슨이 갑자기 중국을 방문해 일명 핑퐁외교가 무르익었다. 우리 정부로서는 상당히 당황했고, 이에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게다가 과거 미국이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켜 공산화가 된 경험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상당한 위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