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카카오 대란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2023-10-17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카카오 서비스 먹통과 관련해서 정치권에서 비판이 이어졌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의 백업 시스템과 비교하면서 건물 하나 불이 났는데 서비스가 먹통이 됐다는 점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다. 양금희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데이터센터 화재에 전국이 '블랙아웃'. 초연결 사회의 민생이 위협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물며 조선 시대 조선왕조실록도 화재, 파손 등에 대비해 4대 사고에 분산 보관했다”면서 카카오에서 데이터센터와 사후 대응 시스템 등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소상히 규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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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조실록의 보관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왕에 대한 기록이다. 그 분량이 방대한 것도 있지만 화재나 전쟁 등으로 인해 소실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4~5부를 만들었다. 그것은 고려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실록은 궁궐에 1부, 소실에 대비해 해인사에 1부 등 총 2부를 만들었다. 하지만 여요전쟁, 홍건적 등으로 인해 소실이 되면서 조선시대에서는 ‘백업’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이런 이유로 4~5부를 만들어서 분산 보관했다. 그것은 세종실록이 완성되면서이다. 세종실록이 완성되면서 복사본의 오탈자를 막기 위해 활자로 4부를 인쇄해서 한양의 춘추관에 한 부를 두고, 나머지 3부는 지방의 사고(史庫)에 보관했다. 그리고 3년에 한번씩 꺼내 볕에 말리는 ‘포쇄’작업을 했다. 이는 곰팡이나 벌레 등을 방지하기 위한 거이었다. 지방은 충주, 전주, 성주였는데 대사헌 양성지는 보관 장소에 이의를 제기하는 상소를 세조 12년(1466) 11월 17일 올린다. 그 이유는 관청 옆에 있기 때문에 화재나 외적의 침입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상소였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종 33년(1538) 11월 6일 성주 사고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태조실록부터 연산군일기까지 전소하면서 나머지 사고에서 인쇄·필사해서 다시 성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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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소실되지 않은 전주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전주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가 불타버렸다. 그것은 전주 유생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사재를 털어 사고의 책들을 전부 내장산으로 옮겨놓고 이듬해 관청에 넘겨줄 때까지 번갈아서 지켜보며 간신히 지켜냈다. 이에 광해군 때 춘추관과 함께, 마니산, 오대산, 태백산, 묘향산에 사고를 만들어 보관하게 했다. 춘추관 사고본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모두 불타고,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묘향산 사고본은 적상산으로, 마니산 사고본은 정족산으로 이전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각지의 사고가 철폐되면서 적상산본은 창경원 장서각으로,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총독부로 옮겨졌으며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하면서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이관됐다. 오대산본은 일제가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반출했는데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모두 소실됐다. 정족산본은 경성제국대학에 살아남았다가 서울대학교 개교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관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대 도서관의 태백산본과 정족산본은 군용트럭에 의해 부산으로 수송돼 경남대한부인회창고, 경남도청 창고에 보관됐다. 창경원의 적상산본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결국 평양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