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2023-10-21 어기선 기자
땜질식 응급조치
이날 00시 20분부터 철판이 성수대교 상판 이음새에 깔려 있다는 것을 운전자들이 목격했고, 서울시는 상판 이음새 부분에 심하게 벌어진 틈새를 덮는 땜질식 응급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윤열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고, 새벽 6시 무렴 성수대교를 통과하던 차량의 운전자들은 그 충격이 너무 커서 서울시에 직접 신고를 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긴급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7시 38부 성수대교 10번과 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트가 붕괴됐다. 이에 사망 32명, 부상 17명이 발생했다. 당시 구조 과정에서 참혹하게 목숨을 잃은 승객의 시신과 피범벅 때문에 구조에 나선 소방관들도 트라우마를 겪기도 했다. 당시 버스 1대, 승합차 1대, 승용차 4대 등 모두 차량 6대가 추락했다. 사망자는 32명인데 사망자 대부분이 거꾸로 뒤집혀 추락한 16번 시내버스에서 발생했다. 특히 아침에 등교하던 무학여중·무학여고 학생들의 희생이 컸다. 이런 이유로 무학여중고는 한동안 초상집 분위기였다. 당시 무학여고 학생들 중에는 일원동과 수서동 출신이 많았다. 1992~1994년 입주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강남 지역 고등학교에 배정되지 못하면서 항강 건너 무학여고로 배정받았다. 한편, 당시 119 상황실에 신고 전화가 접수됐는데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다리가 무너졌다는데 장난전화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총체적 부실
교량 최초 시공자는 동아건설이었는데 설계와 시공이 미흡했고, 유지보수도 미흡했다. MBC는 사고현장의 수중촬영을 했는데 트러스의 강도만큼 중요한 볼트가 손으로 뺄 수 있을 정도로 허술했다. 동아건설은 사고 직후 성수대교 시공 후 5년간 하자보수를 성실히 해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발뺌했지만 여론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사고 발생 7년 후 대법원은 사고의 직접적 원인이 동아건설의 부실시공 때문이라고 확정 판결을 내렸고 동아그룹 자체도 2001년을 끝으로 완전히 해체되면서 동아건설도 프라임개발을 거쳐 현재 SM그룹 계열이 됐다. 또한 급속도로 증가하는 통행량을 대비하지 못했다. 하루 통행량을 8만대로 설계했지만 16만대가 통행을 했다. 이를 서울시가 제대로 단속해야 하는데 그러하지 아니 했다. 교량의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시가 적절한 대책 마련을 하지 않았다.빨리빨리 문화 근절 다짐
이 사고가 발생한 이후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빨리빨리 문화를 근절하자는 움직임이 발생했다. 특히 이듬해 삼품백화점이 무너지면서 그 충격을 더하면서 우리나 건설산업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뜨거워졌다. 이에 정부는 1995년 1월 5일에 준공된 지 10년 넘은 주요 시설물을 외부 전문기관에 정밀안전진단을 맡기도록 하는 ‘시설물의 안전 및 유지관리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고, 이를 책임질 기관으로 한국시설안전공단을 세웠다. 또한 해당 사고 이후로 과적차량 단속이 체계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또한 사고 이후 고등학교 입학생들 학교 배정 최우선 원칙으로 절대 한강을 건너지 않는다는 조항도 생겨났다. 물론 현재는 사라졌다.동아그룹은 역사속으로
이 다리를 지은 동아건설은 동아그룹의 모기업이었다. 그러면서 해외 공사 수주와 국내 부동산 붐으로 잘 나갔었다. 하지만 해외 공사 수주에만 공을 들이면서 경쟁 건설회사들이 아파트를 신축하는 동안 재개발 및 재건축에 상당한 공을 들여야 했다. 이로 인해 막대한 이주 비용이 발생하고, 이주비용을 챙겨줘야 하기 때문에 단기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해당 사고가 발생하면서 신뢰도가 하락하게 되면서 자금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IMF 외환위기가 몰아닥치자 최원석 회장은 워크아웃을 겪었고, 2000년 부도를 맞으면서 그룹이 해체됐다. 계열사 대한통운은 2008년 금호아시아나그룹에 팔렸지만 이후 CJ그룹으로 갔다. 동아건설은 앞서 언급한대로 2001년 파산 이후 2007년부터 프라임개발을 거쳐 SM그룹 계열사가 됐다. 이제 동아그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