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명량대첩 그 이후 왜군의 태도
2023-10-27 어기선 기자
고군산도에 진을 치다
명량대첩은 양력 10월 26일에 있었다. 이순신 부대가 고군산도에 진을 친 것은 양력으로 11월이었다. 왜군은 전주나 남원을 점령하면서 호남의 쌀을 확보할 수 있었다. 풍부한 물자를 갖고 있었지만 왜 수군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왜 육군도 마찬가지였다. 전주나 남원은 고군산도에서 너무나 가까웠기 때문이다. 왜 수군은 서해안에서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남해안으로 물러나야 했다. 이미 임진년 당시 한산해전을 통해 서해 보급로가 막히게 된 것이 보급에 얼마나 차질을 빚게 만들었는지 경험했던 왜군들로서는 이순신 장군 부대가 고군산도에 정박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고민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한양까지 노렸던 왜군
조선은 당시 왜군이 직산까지 점령하자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을 계획을 했고, 왜군 역시 한양을 재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명량대첩을 전후로 해서 갑자기 왜 육군은 방향을 틀어서 남쪽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남해안 순천에 자리를 잡았다. 만약 왜 수군이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 부대를 격파하고 서해안을 장악했다면 보급을 확보해서 한양을 점령했을 것이다. 하지만 명량대첩에서 이순신 장군 함대가 왜 수군을 격파하면서 왜 수군은 더 이상 서해안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왜 육군은 남해안 순천으로 남하해야 했다.왜 하필 고군산도?
이순신 부대가 하필 고군산도에 진을 친 이유는 금강 때문이다. 만약 왜 수군이 고군산도까지 점령을 했다면 금강을 확보하게 된다. 즉, 전라도에서 생산된 쌀을 금강을 통해 거슬러 올라간다면 충청권 전선에 있는 왜 육군들에게 보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금강을 빼앗기면서 충청권 전선에 있는 왜 육군들에게 보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왜 육군으로서는 충청권 전선을 포기하고 남해안으로 밀려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육로를 통해 보급할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산악지대라 쌀을 수송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고, 의병 등이 있었기 때문에 쌀을 약탈 당하는 것이 빈번했다. 결국 서해안을 확보하지 못한 왜군들은 그때부터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들어갔다. 보급로를 확보하지 못하면 한양까지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