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숙종의 이식제한령

2023-10-28     어기선 기자
숙종을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저금리 기조가 유지됐던 주택담보대출의 최고 금리가 연 7%에서 연말에는 연 8%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에서는 연방준비제도가 계속해서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하면서 한국은행 역시 빅스텝을 연달아 단행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시중의 금리가 계속 오를 것으로 보이고, 이는 사채의 이자도 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이자’ 때문에 고민을 해야 했다.

조선은 대출업의 나라

조선은 대출업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초기부터 쌀이나 비단 등으로 펀드를 조성했다. 이를 입본‘입본(立本)’이라고 불렀고, 대출사업을 급채(給債) 방채(放債) 흥리(興利) 식리(殖利) 등으로 불렀고, 대출이자를 ‘이식(利息)’이라, 50%가 넘는 고금리를 ‘장리(長利)’라 칭했다. 대출사업은 관이 주도했는데 지방관들이 ‘펀드’를 조성하고 민간에 대출해서 이자 수입으로 부족한 예산을 충당했다. 특히 지역 방위비 조달에 가장 많이 활용했다. 사실 조선 백성들은 세금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공납 등이나 관에서 주도하는 대출 때문에 힘들었다. 지방관은 대출사업을 했고, 이를 조정이 관리·감독을 해왔다. 하지만 조선후기가 되면서 탐관로리와 민간인들의 결탁으로 많인 폐해가 나타났다. 특히 공채와 사채 대출금리가 각각 20%와 50%가 일반적이었지만 금리를 높이는 경우가 있었다. 이자가 높아지면 백성들의 고통은 더해질 수밖에 없다. ‘무명자집’ 등의 기록에 따르면 대출금리가 연 100%에 이른 경우도 있다.
사진=픽사베이

사채와의 전쟁 선포한 숙종

물론 초기에는 관에서 주도를 했지만 일부 양반들도 사채놀이를 했다. 세종대왕의 사위 윤사로와 한명회, 윤필상 등이 사채업에 종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기 사채업이 관이나 일부 양반들만 주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쌀이나 베는 보관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보관을 위해서는 창고가 필요하고, 창고를 지키는 창고지기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초기 자본이 있어야 대출업이 가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조선초기는 대출업은 관이나 일부 양반의 전유물이었다. 백성들도 대출업에 뛰어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명나라 군대가 조선땅에 들어오면서 상품을 매매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명나라 군대는 화폐를 사용해야 했고, 이에 점차 화폐라는 개념이 조선땅에도 정착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상평통보가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했다. 상평통보가 유통되면서 시장은 이제 쌀과 베로 교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엽전’으로 불리는 상평통보가 통화의 기능을 담당했다.
사진=픽사베이

너도 나도 사채업에

쌀이나 베 등은 보관을 해야 하고, 그것을 지켜야 할 사람이 필요했지만 상평통보는 보관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누구나 집안에 상평통보를 보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평통보라는 것이 보관을 한다고 재산이 증식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이유로 상평통보를 통해 사채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공채는 20%, 사채는 50%의 이자가 부여됐다. 사채가 늘어나면서 백성들은 50%의 사채를 끌어다 쓰기 시작했다. 임금의 입장에서는 대출업으로 인한 수익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관에서 하는 대출업은 주로 내수사에서 관리했고, 임금의 비자금인 내탕금으로 대출업을 한 것이다. 그런데 사채 시장이 점차 확장되면서 공채 시장은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숙종은 사채와의 전쟁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연 20% 이외에는 받지 않게 한 것이다. 기존 50%에서 파격적으로 이자가 내려가게 된다면 많은 백성들이 공채로 몰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식제한령이 사채 시장을 안정시킨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사채 시장은 경술국치 이후 이자제한법으로 정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