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데릴사위

2023-10-31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데릴사위는 혼인풍습 중 하나로, 결혼한 딸을 시가(媤家)로 보내지 않고, 사위가 처가에서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데릴사위는 조선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던 혼인풍습으로 오늘날 ‘장가간다’는 말이 남아있을 정도이다. 데릴사위는 경제적인 문제와 연결이 되면서 데릴사위의 풍습도 변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성공한 데릴사위, 주몽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데릴사위라고 하면 주몽을 떠오른다. 졸본부여의 소서노와 혼인을 해서 졸본부여를 승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졸본부여가 훗날 5부족 연맹체 수장이 되면서 고구려가 됐으니 이만큼 성공한 데릴사위도 없다. 주몽이 데릴사위가 가능했던 이유는 주몽은 부여 금와왕의 장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금와왕의 장남은 대소왕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주몽은 부여 금와왕의 장남이 아니었다. 더욱이 아버지가 부여 금와왕이 아닌 해모수라고 주장하면서 사실상 부여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주몽은 부여 유민들을 이끌고 남하해서 졸본부여에 자리를 잡은 후 소서노와 혼인을 하면서 데릴사위가 됐고, 훗날 졸본부여를 넘겨받아 고구려를 개국했다.

생산성 문제와 연결

데릴사위는 장남에는 해당이 되지 않았다. 다만 장남은 처가에 예물을 주는 방식으로 데릴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데릴사위 제도를 둔 이유는 농업 생산성과 연결이 된다. 지금도 농사일에는 많은 일손이 필요하지만 옛날에는 일손이 더 많이 필요했다. 특히 이앙법(모내기)이 도입하기 전에는 더 많은 노동력을 투입해야 곡식을 산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여자 집의 입장에서 여자가 혼인을 하는 것은 노동력 상실과 연결된다. 여자가 혼인을 해서 ‘시집을 가게 되면’ 여자 집에서는 여성 노동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것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남성을 여자 집에 붙잡아 둬야 했고, 이것이 데릴사위 제도가 정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생산성이 낮은 고대국가에서 남성의 노동력은 농사일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됐고, 여자 집안에서는 남성을 데릴사위로 만들면서 그 노동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장남은 그러하지 못하면서 노동력을 대체할 수단으로 예물을 요구한 것이고, 장남은 여자 집에 예물을 바치는 것으로 데릴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성리학과 모내기로

그런데 데릴사위는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성리학적 유교질서를 강조하는 조선시대에는 데릴사위가 점차 사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데릴사위는 여전히 존재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항복이다. 이항복은 권율 집안에 장가를 가서 데릴사위를 했다. 그리고 조선 중기 이후 모내기가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게 됐다. 즉, 노동력이 남아돌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여자 집안 입장에서 사위는 ‘밥을 축내는’ 존재가 된 것이다. 기존보다도 노동력을 덜 투입해서 높은 생산성을 얻게 되면서 굳이 ‘껄끄러운’(?) 사위를 자신의 집안에 둘 이유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데릴사위 풍습은 점차 사라지게 되면서 일부에서는 혼인식을 올린 후 사흘만 처가에 머물다가 자신의 집으로 가는 풍습으로 바뀌게 됐다. 장가간다는 표현은 데릴사위의 풍습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면서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 처가에 잠시 머물다가 자신의 신혼집으로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만 우리나라는 다른나라와 달리 처가 집안의 성씨를 계승하는 서양자 제도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여성의 집안의 성씨를 자신이나 자신의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