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훈 칼럼] “시진핑 사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2023-11-01     백병훈
[파이낸셜리뷰] 중국에서 또 하나의“사상”이 탄생했다. 귀에 익은 룻소사상, 유교사상, 간디사상, 칸트사상과 같은 거대 담론의 쟁반 위에 자신들 임의로“시진핑 사상”(習近平思考) 이 추가로 얹혀진 것이다. 열흘 전, 중국공산당 20기 중앙위원회 1차회의에서 하나의 사상이념 체계로서의“시진핑 사상”이 선을 보였다. 당초 사상이라는 것은 인간 사유(思惟)의 세계관으로서 사람의 생각과 철학을 반영한다. 시진핑 주석의 국정철학 노선을 제시한 이 사상은“새로운 시대를 위한 중국적 특성을 가진 사회주의 사상”이라고 설명되었다. 이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일찍이 중국 최고지도자 모택동과 등소평은 건국과 국가발전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독창적으로 그려냈고“모택동 사상”과“등소평 사상”으로 화려하게 장식됐다. 권력의 최고 정점에 서 있는 시진핑 역시 중국을 끌고 갈 방향의 지침을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반영하여“시진핑 사상”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였다. 시진핑에게는 새 시대의 과제를 달성할 사회주의건설의 이론과 사상을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결정하고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시진핑의 탁월한 점은 향후 예상될 수 있는 정치적 리스크를“신시대”(新時代)라는 외피에 모두 담아 사전에 분란의 싻을 미리 잘라버리고자 했다는 점이다. 역시 중국 사상이론공작을 담당하는 중국공산당 중앙당교(中间黨校) 교장 출신답게 그는 정교하게 다듬어 자신의 생각을“시진핑 사상”이라는 국가지도 이념으로 앉히는데 성공했다. 과연 어떻게 했을까? 그는 국가건설의 노선과 전략을 놓고 권력 핵심부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의 살벌한 교훈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80년대 초에 있었던 화국봉(華國鋒) 주석의 '비극'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모택동이 직접 선택한 후계자 화국봉은 모택동의 절대적 신임을 배경으로 출세가도를 달려 등소평을 제치고 총리에 임명된 인물이다. 1976년 모택동 사망을 빌미로 극좌파의 쿠데타가 기도되자 그는 이들을 분쇄하고 주석직에 올라 중앙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는 계급투쟁과 무산계급독재로 상징되는 모택동 노선을 추종했던 완벽한 모택동 예찬론자였다. 화국봉은 개혁개방을 주장하는 등소평 등 개혁파들을 '수정주의자'라고 가차없이 공격했다. 이 같은 당내 노선갈등은 이념논쟁과 권력투쟁으로 이어졌고, 화국봉은 결국 자신의 좌경모험주의와 맹목적 모택동 추종주의로 인해 등소평과의 권력투쟁에서 비참하게 무너졌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신봉했던 모택동사상의 이름으로 비판받아 권력에서 쫓겨나는 역설의 주인공이 되어 훗날 '모택동 비극의 유산(遺産)'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화국봉 세력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등소평이 복권되자마자 맨 먼저 착수한 것은 모택동 개인숭배 사상의 배격과 모택동의 이념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모택동 사상”에 대한 비판은 모택동사상의 극좌적 교조(敎條)로 부터 해방시켜 중국 현대화과업의 실천이데올로기를 보장 받으려는 개혁론자들의 일대 반격이었다.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화국봉을 제거한 등소평은 1982년 중국공산당 제12차 대회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적 진리와 중국의 구체적 현실을 결합하여“중국의 특색에 맞는 사회주의”를 건설하자고 호소했다. 이런 권력투쟁의 소용돌이를‘의미심장하게’지켜보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한 사람 중의 하나가 시진핑이다. 훗날 권력의 정점에 도달한 그의 입장에서는 화국봉과 같은 실패한 황제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세심하게 준비하고 다듬어 내 놓은 것이“시진핑 사상”이다. 그래서일까, 시진핑은 당 총서기에 오른 직후부터 중국의 꿈을 실현하려면 중국의 길을 가야하고, 중국의 길은“중국특색의 사회주의길”이어야 한다고 줄기차게 강조했다. 이윽고 2017년 제19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이런 방침이“시진핑 사상”으로 각색되어 공식화됐다. 모택동 이후 2번째로 살아생전에 한 사람의 사상이 중국공산당 당헌에 수록되고, 다음 해에는 헌법 전문 수정안에 채택되기에 이른다. 어찌보면“시진핑 사상”은 등소평 시대의“중국특색의사회주의”를 계승한 것이지만, 강력하고 공고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립하기 위한 사상공작의 산물임에는 틀림없다. 중국에서 하나의 사상이념 체계로서 “시진핑 사상”의 이름으로 등극한 것은 모택동에 필적하는 강력한 권력을 과시하고자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택동사상과 등소평사상의 뒤를 이어 중국공산당 역사상 3번째의 교리(敎理)가 창시됐음을 의미한다. 장기집권과‘제2의 모택동’을 꿈꾸는 시진핑에게는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의 제출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런 시진핑의 위세는 곧바로 자신을 3연임의 국가주석이자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중앙군사위 주석으로 밀어 올렸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근대화를 혁명과정으로 이해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지적전통(知的傳統)에 영향 받은 중국을 근대화이론의 입장에서 보면 공산주의도 사회발전을 위한 방법론 중 하나가 된다. 그렇다면, 살아남으려는 중국의 몸부림도 이런 시각에서 조망될 수 있다. 사실 중국은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을 집어 삼키느냐, 아니면 중국이 마르크스주의를 집어 삼키느냐의 오랜 싸움의 여정을 걸어 온 나라다. 10년 전 시진핑이 중국의 블루오션인“중국몽”(中國夢)의 기치를 올린 까닭도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집어 삼키지 않으려면 스스로 변화해야 했다. 마르크스주의는 결코 정지된 것이 아니라 교의(敎義)의 확대, 제거, 그리고 재정의의 과정에 의해 진전되어 왔다. 이를 거부하면 내부로부터 노선갈등, 이념투쟁을 거쳐 권력투쟁 그리고 급기야 정치투쟁으로 까지 발전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이를 피해야 했다. 그가“신시대”를 방패삼아 내건“시진핑 사상”의 등장은 이렇게 역사속의 엄연한 현실적 사연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백병훈 약력

비교정치학 박사 프라임경제신문 주필, 사장 한국정치심리공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