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리뷰] 딜레마 빠진 금융당국
2023-11-04 전수용 기자
한국은행과 정부, 서로 상충되는 금융정책
지난달 '레고랜드' 사태로 시장의 불안이 커지자 정부는 '50조 원+α'의 시장 유동성 공급대책을 발표했다. 또 이달 1일에는 5대 금융지주회사가 자금시장의 경색을 완화하기 위해 95조원 규모의 유동성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한국은행이 이달로 예정된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큰 폭으로 인상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연준)가 2일(현지시각) '자이언트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p) 인상)을 밟아 한미 기준금리 차이가 1%p 벌어지면서 한국은행의 빅스텝도 유력해졌다. 미국과의 금리 차이를 방치하면 외국인 투자자금이 빠져나가고 원화 가치가 떨어져 물가 상승이 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KB증권 관계자는 “FOMC(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 회의 결과 최종 금리가 5%로 상향될 것으로 보여 11월 금통위의 50bp(1bp=0.01%p) 인상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며 “한미 금리차를 관리하기에는 지금이 적기”라고 진단했다. 금융시장에서는 정부와 금융업계가 대규모 유동성 지원책을 내놓은 상황에서 한국은행이 또 한 번 큰 폭의 금리인상을 단행하게 되면 물가를 잡기 위한 기준금리 인상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를 들면, 정부 유동성 지원의 일환인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Liquidity Coverage Ratio) 규제비율 정상화 유예, 예대율 규제 완화 등에 따라 은행의 대출 여력이 커지면 시중에 통화량이 증가할 수 있다. 이는 기준금리를 올려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고자 하는 한국은행 기조와 배치된다. 한쪽에선 돈줄을 강하게 막고, 한쪽에선 대규모로 풀어주는 셈이다.엇갈리는 시장 평가
이같은 상황에 대해 일선 금융시장에서는 서로 엇갈린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보고서를 통해 정부의 유동성 지원이 시장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지금 시점에서 필요한 결정이라고 판단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시장의 불안이 커져 유동성이 위축되면 멀쩡한 기업들이 흑자도산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으며, 레고랜드 사태 등 신뢰를 훼손하는 이벤트에 대해 정부가 신속하게 대응하는 게 맞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5대 금융지주이 발표한 95조원 규모 지원책에 대해서는 “자금을 당장 집행하겠다”라는 의미보다 “이 정도로 뒷받침할 수 있는 여력이 되니 안심해라”라고 시장을 안심시키고 신뢰를 되살리려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해석했다. 이같은 의견과는 반대로, 물가 상승 문제 해결을 우선순위에 둬야 하는 상황에서 정부의 유동성 지원안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와 관련 정부의 '50조 원+α' 등 매크로(거시적인) 신용공급 방안은 인플레이션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되며, 어려운 중소기업들에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은 레고랜드 사태 등 시장의 일부 문제가 아닌 국가 경제 전체의 차원에서 기준금리를 결정해야 하며, 물가 상승 문제부터 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현재 금융지주사들이 시장에 유동성 공급을 얼마나, 어떻게 할지에 대한 세부 계획은 아직 발표되지 한은 상황이다. 이에 대해 금융위원회 측도 유동성 지원안이 아직 ‘잠정적인 계획’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1일 발표된 금융지주사들의 95조원 규모 지원안의 경우 일부 증안펀드, 채안펀드는 정부가 기존에 발표했던 지원책과 겹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관계자는 이어 “금융지주사에서 자율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보니 규모를 확정적으로 공식화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