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훈 칼럼] 죽어서 ‘베트남의 별’이 된 24살 베트남 청년

2023-11-15     백병훈
[파이낸셜리뷰] 60년 전에 베트남의 작가가 쓴 한 권의 책을 다시 펼쳤다. 베트남 내전과정에서 벌어졌던 감동적인 이야기의 주인공 24살 베트남 청년과,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집회에 참가할 24살 또래의 한국 젊은이들과는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하는 생각 때문이다. 베트남전쟁이 본격 불붙는 1964년 그 해, 베트남 중부 출신 우옌 반 쵸이는 갓 결혼한 아내와의 신혼생활도 미룬 채 민족해방투쟁의 일선으로 나섰다. 그러던 5월 9일 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체포됐다. 사랑하는 판 티 쿠엔과 결혼한 지 19일째 되던 날이다. 다섯달 뒤 그는 꽃다운 청춘 24살에 총살형을 당한다. 베트남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방문하는 미 국방장관 맥나마라를 폭사시키려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 사건은 곧바로 남과 북의 베트남, 남미 여러 나라들, 미국과 유럽을 거쳐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세상을 들끓게 했다. 뭔 일이 있었을까? 베트남은 오랜 세월‘민족해방투쟁’을 겪어야만 했다. 외세의 식민지배에 맞선 투쟁은 베트남 북쪽에서 1930년 호지명(胡志明)의‘베트남공산당’을 출현시켰고,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하자‘베트남민주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반면, 남쪽에서는 동남아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이 친미 성향의 고딘 디엠(吳廷琰)을 지원하여 1955년‘남베트남공화국’이 선포됐다. 이로서 또다른 베트남 비극의 서막이 오른다. 파노라마 같은 이 전란의 소용돌이 한켠에 쵸이가 홀로 서있었다. 3살 때 프랑스군을 피해 정글로 피신한 엄마는 굶주림과 고생으로 세상을 떠났다. 빈농출신 아빠는 저항운동에 나섰다가 고문 받아 장애인이 됐고 가족과 헤어져 살아야 했다. 베트남에서 식민지배와 지주제도 하의 농민들의 피폐한 삶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으리라. 반외세 투쟁과 내전의 시기를 보내면서 그는 자연스레 소년전사가 됐다. 이런 그에게 북쪽의 ‘베트남민주공화국’ 건국은 희망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소년 쵸이는 붉은 스카프를 목에 두른 ‘소년선봉대원’이 됐다. 수도 사이공으로 들어가 전기 견습공이 되면서 진보적 청년조직 ‘인민혁명청년동맹’에 가세한다. ‘항미구국투쟁’에 나선 그는 소년전사에서 청년전사로 훌쩍 성장해있었던 것이다. 그가 동맹활동을 하다가‘베트콩의 앞잡이’라고 매도당했을 때, “노동자와 민중의 이익을 위한 투쟁이 빨갱이라면 빨갱이는 참 근사한 게 아닌가?”라고 맞받아 쳤던 것이 쵸이였다고 한다. 이러한 남과 북의 대립과 혼란 속에서 베트남인들은 디엠정권을 외면했다. 정부의 부패, 반공과 카톨릭을 앞세운 정치적 박해와 독재는 민심이반을 불러왔다. 거리는 정권타도의 불길이 올랐고 각종 시위와 무장봉기가 그치지 않았다. 반복되는 쿠데타와 노동자 총파업은 극심한 사회혼란을 초래했고, 이윽고 1963년 말 디엠은 쿠데타로 실각하고 사살된다. 그러나, 새로운 정권도 내부혼란을 감당치 못해 베트남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미 국방장관 맥나마라가 베트남 방문에 나섰고, 우옌 칸 정권은 민중의 저항을 진압하고 경고하기 위해 8월 11일, 서둘러 쵸이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이 소식은 곧바로 전 세계에 타전된다. 그런데 이 순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미국의 영향 하에 있던 남미 베네즈웰라에 이미 민족해방투쟁과 반독재투쟁이 진행 중이었고, ‘베네즈웰라민족해방전선’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미공군 군사고문 마이켈 스몰룬 대령을 납치해 감금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들은 즉각 성명을 내고 베트남에서 수감 중인 우옌 반 쵸이와의 교환석방을 요구했다. 만일 쵸이가 처형되면 1시간 후에 스몰룬 대령을 총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 존슨 대통령은 쵸이의 처형 연기를 명령했다. 8월 14일 ‘베네즈웰라민족해방전선’은 스몰룬 대령을 석방한다. 그러나 다음 날 베트남에서 쵸이의 총살형이 전격 집행된다. 처형 당일 아침, 형장에 입회한 남베트남과 외신기자들은 참으로 온순하고, 선한 한 청년을 마주하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는 수감 중에도 그랬듯이 민중과 민족을 위해 싸워야 하는 이유를 그들 앞에서 명쾌하게 설파했다. 남베트남 전체가 쵸이의 처형에 항의하고 민중들이 들고 일어났다. 남미 여러 나라가 항의에 동참했다. 북쪽의 베트남 동포들도 궐기에 나섰다. 베트남 노동당 기관지는 “그대 최후의 숨결에 이른 아침의 유성은 유난히 더 빛났다”고 그의 죽음을 아까워했다. 그의 불꽃같은 애국심이 베트남 민중들을 분기시켰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역사의 진실이며 그 진실은 ‘불멸의 불꽃으로 살아’>라는 책자로 다시 태어났다. 우옌 반 쵸이, 그는 민족해방투쟁의 시기에 여느 사람들처럼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고, 호지명을 존경했으며, 해방전사로 살다가 갔다. 그는 죽어서 “베트남의 별”이 되었다. 훗날 그를 추억하며 베트남의 철강기지 타이우엔 공장 언덕위에는 쵸이의 거대한 기념상이 세워졌다. 그가 못다 사랑했던 미망인이 된 판 티 쿠엔은 그의 뜻을 쫒아 해방구로 들어가 헌신적인 저항운동에 나섰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린 소년시절의 쵸이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을 읽고 소년선봉대원에 가입했을까? 청년시절, 그가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선하다고 믿는 공산주의 혁명가로서 청년동맹원이 되었을까? 모세처럼 핍박받는 자기민족의 해방을 갈망하는 맑은 영혼의 젊은 전사는 아니었을까? 아마도 24살 청년 쵸이의 정신세계는 공산주의 이론과 철학보다는 민족, 나라의 독립, 인간다운 삶, 그리고 자유와 정의에 대한 “순수”의 열망이 가득 차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국의 젊은이들에게서 쵸이와 같은 나라사랑의 순수한 마음을 보고 싶다. 대한민국에서 독립과 자유와 사회정의의 선봉에 선 것은 언제나 젊은이들이었다. “순수”는 세상의 편견과 오해, 심지어 적개심마저 가슴 속에 담아 녹인다.

백병훈 약력

비교정치학 박사 한국정치심리공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