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시치미

2022-11-18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시치미는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매사냥에서 매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매의 꽁지나 발목에 걸어두는 매 주인의 이름표 혹은 주소패를 의미한다. 고려시대 때 매는 중요한 재산 중 하나였다. 이런 이유로 매를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치미를 달았다. 문제는 시치미를 떼버리면 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시치미를 뗀다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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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부터

매사냥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해왔다. 고구려의 경우 삼실총 무덤 제1실 남쪽 벽에 달리는 말 위에서 왼팔에 매를 얹은 매사냥꾼을 그린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백제는 아신왕에 대해 “성품이 호매하고, 매 기르고 말 달리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에서 도래한 백제 왕족 주군(酒君)이 오진 천황(應神天皇)에게 바쳐진 희한하게 생긴 새가 매임을 알려주면서 천황에게 매사냥을 가르쳐 줬다고 기록돼있다. 이밖에도 여러 기록에서 매사냥의 기록이 남아있다. 다만 매사냥이 고대에는 생업적 성격이 강했지만 점차 오락의 성격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 기록에서도 나온다.

고려 때 매사냥은 귀족의 상징

고려시대는 매사냥이 귀족의 상징이었다. 충렬왕 때는 응방(鷹坊)이 있었다. 응방은 매사냥과 관련된 관청이었다. 고려시대 때 매사냥이 성행하게 된 것은 원 황제의 부마가 되면서 몽골 제국의 내정간섭이 심하게 작용하면서이다. 송골매, 보라매, 매를 관리하는 사람을 수할치, 시치미 등이 모두 몽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특히 고려말로 접어들면서 매사냥이 잦았다. 문제는 매사냥을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고려 우왕 시절에는 매사냥에 몰두하면서 신진사대부는 왕의 매사냥에 대해 만류를 했다. 권근 등이 매사냥을 만류하자 우왕은 활로 쏘려고 했다. 그리고 여러 간관의 이름을 적어서 간직하며 왜구가 쳐들어오면 전투 맨 앞에 세워야 한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우왕에게 매를 바쳐서 환심을 얻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매관매직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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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매사냥이

고려시대가 매사냥으로 인해 휘청거렸다는 점에서 신진사대부가 세운 조선시대에는 ‘사냥’을 금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태종은 매사냥을 즐겼다. 매사냥에 필요한 매를 바치는 것은 하나의 역(役)으로 다루어졌다. 조선 태조는 왕자와 대군들에게 매를 기르다 민간의 닭이나 개를 죽이는 일이 없도록 아예 매를 기르지 말라는 명을 내렸고, 태종 9년(1409년)에는 국상 중인데도 사람들이 매사냥을 하면서 민가의 곡식을 밟아 피해가 많다는 보고가 올라오기도 했다. 태종 이후 매를 기르는 사람에게는 응패(鷹牌)라 불리는 일종의 허가증이 지급되어, 패가 없는 매가 민가의 닭과 개를 도둑질하는 행위를 엄금했다. 하지만 응방이 혁파되고 매를 잡아 올리는 사람인 응군이 혁파되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정도로 매사냥을 사대부도 즐겼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매사냥을 즐겼지만 한국전쟁과 산업화로 인해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