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요정(料亭)
2023-11-21 어기선 기자
료테이(料亭 りょうてい)에서 출발
요정은 일본에서 운영하던 ‘료테이(料亭 りょうてい)’에서 출발한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면서 조선 황실이 무너지고 그에 따라 궁궐에서 요리를 도맡아 하던 숙수(남성 요리사)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다. 이에 숙수들이 식당을 차리면서 한정식 문화가 태동을 했다. 이런 가운데 일제강점기는 공창제를 공포하면서 기생들은 ‘권번’에 기적을 두고 세금을 내면서 활동을 하는 허가제로 바뀌게 된다. 이에 요릿집에서 권번에 있는 기생을 불러 대접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정착을 하면서 요릿집이 요정이 됐다.접대 문화의 본산
요정은 접대 문화의 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인, 권력자, 기업인들이 여자를 끼고 정치에 관련한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면서 접대를 했었다. 이런 이유로 요정 문화를 없애기 위해 이승만 정권부터 계속해서 움직임이 보였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제2공화국이 탄생하면서 장면 총리는 요정 문화를 없애기 위해 요정 출입 자체를 금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 군부세력이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다시 요정 문화가 흥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군부세력은 요정에서 정치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정인숙 사건 발생
그러던 중 정인숙이라는 여성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70년 3월 1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부근에서 교통사고를 가장해 총격 암살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제3ᅟᅩᆼ화국 시절 벌어진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 중 하나다. 당시 정인숙은 1960년대 후반에 미혼인 상태에서 아들을 한명 출산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정권 최고위층의 자녀라는 소문이 있었다.이런 상황 속에서 사망을 하면서 정인숙의 수첩이 세상에 공개됐는데 그 수첩에는 고위 인사의 이름과 연락처가 기록돼 있었다. 그 이름에는 재벌 회장 몇명과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이후락 주일 대사, 김형욱 前 중앙정보부장 등의 고위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박정희 대통령까지 적혀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녀의 아들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 당시 국무총리인 정일권이 유력한 후보로 손꼽혔다. 이에 당시 신민당 조윤형 의원은 대정부질문 도중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개사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 노래는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 할 것 같으면/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나를 죽이지 않았다면/영원히 우리만 알았을 것을/죽고 나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였다. 이 과정에서 정인숙이 단순히 호스티스라고 알았던 많은 사람들이 요정이라는 존재를 알게 되면서 요정 문화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까지 수첩에 거론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결국 궁정동 안가에서 술자리를 갖게 됐고, 이것이 10.26 사태로도 이어졌다.1980년대 룸살롱이 들어오면서
요정문화는 197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1980년대 룸살롱 문화가 들어오면서 요정 문화가 사라졌다. 앞서 언급한대로 정인숙 사건 등으로 인해 요정 문화에 대한 사회적 비판 여론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유흥문화가 룸살롱 문화로 바뀌게 된 것이다. 또한 조직폭력배와 룸살롱이 연결되면서 조폭의 주요 수입원으로 떠오르면서 1980년대 조폭이 활개를 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그러면서 요정은 점차 퇴색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요정은 존재한다. 다만 그 명맥만 유지할 뿐이다. 유명한 요정으로는 삼청각, 선운각, 동래별장, 대원각, 청운각, 오진암, 명월관, 태화관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