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1월 25일 앤드류 카네기 탄생

2023-11-25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835년 11월 25일은 영국 스코틀랜드 파이프 던펌린에서 앤드류 카네기가 탄생한 날이다. 스코틀랜드계 미국인으로 존 데이비슨 록펠러와 함께 19세기 미국 산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인이자 아메리칸 드림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아울러 현재까지도 경제계에서 거론되는 인물 중에 한 명이다. 지독히 가난한 이민자 소년에서 초대형 철강회사의 CEO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부의 축적에는 여러 가지 구설수가 있었고, 이에 말년에 사회복지 사업에는 상당한 평까 있으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산업혁명에 밀린 집안

카네기가 태어날 무렵에는 산업혁명이 보급되면서 가내수공업이 설자리를 잃게 됐고, 카네기 아버지 역시 사업이 힘들어졌다. 생계가 힘들어지면서 결국 일가족은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로 이주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카네기는 용광로에 석탄을 넣는 화부 역할을 했고, 그 성실성을 인정받으면서 전보배달부가 됐다. 전보배달부에서 모스 부호를 써서 전보를 보내는 전신기사로 승진했고, 1853년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에 취직을 했다.

벼락부자로

그리고 장거리 노선에 침대차를 도입하면서 큰 성공을 이뤘다. 그래서 농장을 구입했는데 막대한 석유가 터지면서 벼락부자가 됐다. 벼락부자가 된 카네기는 석우로 축적된 재산을 바탕으로 철강업에 투신하면서 카네기 제철을 세웠다. 다만 그 과정에서 공정경쟁보다는 독점으로 재산을 불렸다. 특히 미국 남북전쟁 당시 막대한 부를 축적을 했다. 국회의원을 매수해 누군가 자신의 사업에 뛰어들면 세금을 왕창 먹이도록 했으며 처음에는 싸게 팔아 경쟁자를 몰락시킨 다음 그 후에는 값을 두 배 이상 받는 이른바 매점매석을 이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카네기는 자신의 재산을 물려줄 자손이 없으면서 일찌감치 자신의 사업에서 손을 뗐다.
사진=픽사베이

카네기가 존경 받는 이유는

이같은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카네기가 오늘날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이유는 말년에 사회사업에 열중했기 때문이다. 카네기는 “통장에 많은 돈을 남기고 죽는 사람처럼 치욕적인 인생은 없다” 혹은 “부자로 죽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다”고 말했다. 카네기는 JP모건에 철강회사를 매각하면서 재단을 설립했고, 본격적인 사회사업을 시작했다. 카네기는 2천500여개의 공공도서관을 건립하고 모두 사회에 헌납했다. 미국의 도서관 중 절반이 카네기가 헌납한 도서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피츠버그의 카네기 멜런 대학교도 카네기의 기부금으로 설립된 학교이다. 카네기가 이때 기부하면서 내걸었던 구호가 ‘노동자 계층 자녀들을 위한 직업훈련학교’였다. 사업가로 활동할 때 노동인권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카네기가 기부한 액수는 3억달러이다. 당시 일본의 1년 국가 예산이 1억 3천만 달러인 점을 보면 엄청난 액수이다. 카네기가 사망했을 때 3천만 달러만 남았다. 반전주의자이기도 했다.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려고 할 때에도 윌리엄 매킨리 당시 미국 대통령과 독대해서 남북전쟁을 통해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은 카네기 자신이지만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카네기 국제평화기금’(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이 설립되기도 했다. 아울러 네덜란드 헤이그에 세워진 국제사법재판소의 건물(통칭 ‘평화궁’)도 그가 기탁한 돈으로 지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