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국민방위군 사건
2023-12-08 어기선 기자
1.4 후퇴 이후 국민 총동원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쳐들어왔을 때만 해도 수세에 몰렸지만 인천상륙작전으로 9.28 서울 수복을 한 후 북진을 했다. 이에 압록강까지 다달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를 해야 했다. 1.4 후퇴를 하면서 이승만 정권은 국민총동원을 내렸다. 전국적으로 청년들은 영장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집 장소로 몰려들었다. 어차피 남아 있으면 북한 의용군에 끌려갈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차라리 군인이 돼서 북한군과 싸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또한 밥이라도 먹여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우리 정부는 중공군 개입 즈음에 기존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를 해체하고 국민방위군을 창설했다. 그리고 대한청년단장이면서 청년방위단 사령관인 김윤근이 국민방위군 사령관이 됐다. 이에 서울, 경기, 강원, 인천 지역에서만 42만명이 소집됐다. 소집된 장정들은 국민방위군 장교들이 2~300명식 중대 단위로 편성해 도보로 교육대가 있는 경상도로 인솔했다. 그러면서 막대한 예산이 편성됐다. 1만명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데 쌀이나 군복 하나 안 주고 소집 장소만 하달했다. 그리고 행군 책임자가 경유지의 시장, 군수에게 육군 본부로부터 하달 받은 양곡권을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고 했다. 하지만 이 양곡권 역시 국방부와 내무부가 서로 양곡권을 갖겠다고 다투면서 양곡권 지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12월이기 때문에 사상 유례 없는 혹한기였다. 당시 소집에 응했던 장정들은 정부가 알아서 군복과 식량을 주겠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결국 아사자나 동사자가 속출할 수밖에 없었다.예산 횡령 횡행
그러는 사이 예산 횡형이 횡행했다. 예산 횡령이 이뤄졌던 이유는 예산을 구체적으로 배정한 것이 아니라 국민방위군 예산이라고 배정한 것이다. 즉, 어느 누구도 횡령을 한다고 해도 티가 나지 않는 그런 예산이었던 것이다. 당시 1인당 1일 양곡 4홉, 취사연료비 40원, 잡비로 10원을 책정해 50만명의 3개월 예산인 209억원 830만원이 배정됐다. 그런데 횡령이 어떤 식으로 이뤄졌냐 하면 엿공장은 생산 능력 대비 소비됐다면서 쌀 양이 계획안보다 6배가 넘었다. 즉, 그만큼 뒷돈을 챙긴 것이다. 자동차는 250대를 구입했다고 보고를 했지만 실제로 20대밖에 구입하지 않았다. 명태는 386만짝을 구입했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4천짝을 구입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같이 기술한 것은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사령관부터 그 부하군인들까지 횡령을 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국민방위군에 배정된 예산은 눈먼 돈이었다. 국민방위군에 소집된 장정들이 굶어 죽건 얼어 죽건, 그들에게 예산은 자신의 뒷주머니를 채워주는 유용한 것이었다. 국회진상조사위원회가 조사한 횡령액수를 따지면 인원수 허위보고에 의해 현금 횡령이 23억 5천126만원, 양곡횡령이 20억 4천710만원, 예하 공금 횡령이 28억 8천328만원으로 총 72억 8천164만원이었다. 하지만 이는 수뇌부만 해먹은 것으로 공식적으로 드러난 액수이다. 다시 말하면 얼마나 횡령을 했는지 추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처음에 덮으려고 했다가
국민방위군 징집자들이 전국 곳곳에서 죽자 사회적 문제가 됐다. 하지만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은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병은 훈련을 잘 받고 있으며, 일부 불순 세력들이 낭설을 퍼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회에 출석한 국방부장관 신성모도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실에 대해 묻는 국회의원들을 향해 제5열의 책동이라고 주장했다. 제5열은 북한 간첩을 의미한다. 이같은 주장에도 워낙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자 결국 수사가 진행됐고, 관련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하지만 1심 재판에서 연루자 16명 중 실형 4명, 파면 10명, 무죄 2명으로 판결이 났다. 특히 사령관 김윤근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국민은 판결 소식이 들리자 극도로 분노했다. 특히 부통령 이시영이 분노를 표하면서 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도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신성모 국방장관을 경질했고, 이기붕을 국방장관에 앉혔다. 그리고 육군참모총장을 정일권에서 이종찬으로 교체했다. 결국 국민방위군 주요 간부 5명에게 사형이 선고됐고, 사형이 집행됐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신성모가 세력을 잃고 사건 관련자들을 엄벌했던 이기붕이 후계자로 부상하게 된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