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2월 9일 역사상 최악의 폭군 충혜왕 원나라에 압송

2022-12-09     어기선 기자
SBS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343년 음력 11월 12일(양력으로는 12월 9일) 고려 충혜왕이 원나라에 압송된 날이다. 충혜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포악한 최악의 군주로 불리던 인물이다. 흔히 조선시대 연산군을 떠오르기 쉽지만 역사상 가장 포악한 최악의 군주는 충혜왕이다. 연산군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다. 시호에 ‘惠’(은혜 혜)자가 포함이 된다면 중국 역사나 우리나라 역사에서 폭군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사후에 딱히 붙일 명칭이 없기 때문에 惠자를 붙인 것이다. 물론 ‘충혜’ 시호는 원나라가 붙여줬다.

사냥에 미친 군주

우리나라 최악의 군주라는 것이 세자 시절부터 유명했다. 절(寺) 지붕에 있는 새를 잡는다고 절에 방화를 했다. 불량배와 어울러 여자를 겁탈하기도 하면서 결국 부왕인 충숙왕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었지만 고치지 않았다. 재위 원년부터 ‘사냥’에 미쳐 있었다. 기록의 대부분이 ‘사냥판을 벌였다’로 끝난다. 그것이 아니면 ‘물놀이를 구경했다’였다. 국왕이 사냥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고위 계층 사람들의 사냥과는 달랐다. 일단 호위병이 있어야 하고, 요리사, 짐꾼, 전문 사냥꾼 그리고 수백명의 몰이꾼이 필요하다. 수백명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경비가 상당히 들 수밖에 업었다. 조선시대 당시 임금이 사냥을 하러 나서려고 할 때 관료들이 “전하 통촉하옵소서”라고 한 것도 임금이 사냥을 한번 나갈 때마다 경비가 상당히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충혜왕은 거의 매달 사냥을 갔다.

엽기적인 패악질

선대인 충숙왕도 엽기적인 행각이 많았다. 아내를 폭행하는가 하면 신하의 아내를 빼앗기도 하면서 폐위가 됐다. 그런데 충혜왕은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았다. 충혜왕이 신하들의 부인을 겁탈하기도 했는데 이는 애교 수준이다. 장인의 후처를 겁탈하는가 하면 부왕(父王)의 후처를 겁탈했다. 아버지 충숙왕에는 아내가 두 명으로 수빈 권씨와 충숙왕의 정비(正妃) 격인 경화공주(원나라 공주, 원 간섭기에는 원나라 공주가 왕비가 됐다)가 있었다. 그런데 경화공주를 범한 것이다. 경화공주는 원통함을 참지 못하고 원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말을 구입하려고 했지만 결국 말을 구입하지 못해 원나라로 돌아가지 못했다. 결국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이 원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면서 충혜왕이 원나라로 소환됐다. 기철이 부원배이지만 이때만큼 충혜왕을 원나라에 소환하게 하면서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충혜왕이 막장을 달렸다는 것이다. 결국 충혜왕은 귀양을 가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 가는 도중 악양현(岳陽縣)에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했다. 충혜왕이 급사했다는 소식이 고려에 들리자 백성들은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기철과 정치적 대립

앞서 언급한대로 기철이 원나라에 이 사실을 알려서 결국 충혜왕이 압송되게 됐는데 그 과정 속에서는 부원배인 기철과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충헤왕이 비록 각종 막장을 저질렀지만 상업활동을 권장했고, 유통 구조를 개선하고, 토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는 기철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개혁이 고려의 재정을 확충하고, 그리고 개혁적인 것으로 백성들을 살찌우게 했다면 역사상 성군으로 기록될 수 있었겠지만 워낙 막장을 저질러서 결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기록되게 됐다. 만약 충혜왕이 이때 제대로 된 개혁을 했다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충혜왕은 막장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