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사북사건

2023-12-15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사북사건은 1980년 4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위치한 동원탄좌 소속 탄광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어용노조 등에 분노를 일으킨 사건이다. 전두환 신군부의 5.17 군사쿠데타에 영향을 준 사건이다. 또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공수부대를 투입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 사건이기도 하다.

열악한 노동 환경

동원탄좌는 대한민국 민영광산 중에 최대 규모를 자랑했고, 5천여 노동자가 일을 했으며 석탄생산의 11%를 차지했다. 하지만 노동환경은 열악했다. 30~40도가 넘는 고온 속에서 고난도 노동을 해야 했고, 산업재해는 빈번히 발생했다. 하지만 월급은 평균 15만 5천원이었다. 1980년 물가가 라면 100원, 버스비 100원, 소주 200원, 짜장면 500원이었기 때문에 월급은 그야말로 쥐꼬리만한 월급이었다. 여기에 탄광촌 물가는 시중보다 30% 비쌌다. 이에 가족들의 생계도 어려웠다. 상수도 시설은 보급되지 않았고, 가을만 돼도 추위가 몰려왔기 때문에 연탄 난로를 설치해야 했고, 연탄가스 중독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을 했다. 오죽하면 서정화 당시 내무부 차관이 1980년 3월 14일 계엄위원회 회의에서 “광산의 경우 광부들의 생활은 한마디로 비참하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무엇보다 산업재해가 계속 발생했다. 당시 석유파동으로 인해 석탄의 소비가 늘어나면서 탄맥을 찾기 위해 더욱 깊은 곳을 파고들어야 했다. 이런 이유로 1980년에는 전체 탄광노동자 5만 6천173명 중 총 재해자는 5천885명으로 광부 10명 중 1명이 죽거나 다쳤을 정도로 높은 재해율을 보였다.

회사의 행태

문제는 회사가 작업환경을 개선하지 않았고, 임금을 깎거나 체불까지 하는 등 갑질이 빈번했다. 여기에 노동자들이 산재라도 신청하면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가족을 협박했다. 게다가 임금인상 시기가 도래하기 3개월 전에 임금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려 임금인상분을 상쇄하게 만들어 임금인상 효과를 실질적으로 낮추는 편법을 사용했다. 여기에 ‘암행독찰’이라는 이름으로 사장 친인척으로 구성된 간부들이 탄광과 시내를 돌아디니면서 불만을 토로하는 노동자들을 감시했다. 뿐만 아니라 노조 지도부에게 다양한 혜택을 주면서 어용 노조로 전락하게 했다. 특히 회사편에 서있는 사람을 노조지부장 선거에 출마하게 했다. 당시 노조지부장은 대의원이 투표하는 간선제 형식이었는데 선출된 대의원들에게 관광여행을 시켜주고, 선거날 투표장에 내려놓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회사편의 사람에게 투표를 했다.

폭발한 노동자들

결국 노동자들이 폭발하면서 1980년 4월 15일 26명의 조합원들이 광산노련 사무실로 몰려가 지부장선거 직선제, 임금인상, 처우개선 등을 외쳤다. 4월 18일에는 더 많은 노동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에 노동자들이 경찰서에 가서 집회 신청을 했다. 경찰은 집회 불허를 결정했지만 노동자들에게 통보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4월 21일 아침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집회가 허용된 것으로 착각하고 몰려들었다. 하지만 경찰이 집회를 제지하게 되면서 충돌을 했다. 그러면서 경찰이 사람을 잡아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노동자들은 경찰서로 몰려갔고, 경찰서는 노동자들에게 점거됐다. 결국 강원도경은 그야말로 비상이 걸렸다. 경찰들이 사북에서 전부 철수한데다 경찰서가 파괴됐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이에 경찰병력 347명이 출동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사북읍에서 광업소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뢴 철둑길 앞 안경다리로 집결했다. 모인 노동자들이 1천500여명이었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자 노동자들은 돌을 경찰들에게 던지면서 경찰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지역주민들까지 가세하면서 그야말로 공성전이 펼쳐졌고, 경찰 1명이 사망하고 70여명이 부상을 입는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경찰이 진입에 실패를 하면서 경찰은 전두환 신군부에게 공수부대를 투입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1군 계엄사령부에서는 민심이 악화될 것을 우려해 출동승인을 내어주지 않았다. 결국 협상 테이블이 마련됐고, 협상 끝에 타결을 이뤄냈다. 그러나 강원도경은 주모자 색출에 나섰고, 계엄사령부 역시 비상계엄령을 활용해 ‘사북 사건 합동수사단’을 조직했다. 그러면서 관련자들을 모두 연행했다. 당시 체포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도 폭행을 가했다. 체포된 사람들은 고문을 받았고, 사북사건 때 있었던 폭력행위를 자백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신군부는 사북사건이 전국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사북사건이 전국으로 알려지게 되면 전두환 신군부 물러나라는 요구가 전국적으로 빗발칠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리게 됐다. 또한 전두환 신군부는 사북사건 때 공수부대를 투입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를 하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폭압적인 진압을 했다. 대중매체에서는 1995년에 방영한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에서 대학에서 만난 친구 하석주의 부모를 만난 인범이 자신의 출신을 사북이라고 소개할 때 석주의 부모가 사북사건을 잠깐 거론하는 장면으로 언급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