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김영삼 그리고 골덴 양복
2023-12-16 어기선 기자
값비싼 맞춤 정장 입었던 시대에
당시 국회의원들은 값비싼 맞춤 정장을 입고 격식을 차렸다. 당시 물자로 부족했기 때문에 맞춤 정장을 입는다는 것은 과소비를 하는 것이었으며, 물론 삼성 제일모직 등에서 양복을 생산하기도 했지만 수입산 양복이 주류를 이뤘다. 그런데 국산 골덴지로 만든 값싼 기성품을 넥타이 없이 국회에 등원한다는 것은 충격을 안겨주기 충분했다. 이들이 골덴 양복을 입고 등장하는 모습은 기자들에게는 충격을 줬다. 그리고 기자들 앞에서 맹약칠장을 선언했다. 맹약칠장은 차를 폐차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요정(고급술집)에 출입하지 않으며, 이권운동을 금하며, 선거제 개혁을 추진하며, 학생들의 생활혁신운동을 지지하며, 자유민주주의와 인격의 존엄성이 보장될 수 있는 남북통일을 노력하며, 근로권(노동권)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모임 이름을 기자들이 묻자 박준규 의원은 “이건 무슨 ‘서클’ 같은 게 아니다. 하여간 여러분이 지어주시는 대로 하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그러자 언론들은 청조(淸潮) 즉 맑은 물 운동이라고 명명하면서 청조회라고 불렀다.학생들 생활혁신운동에 영향
신민당 소장파가 청조 운동에 나선 것은 학생들의 생활혁신운동에 영향을 받아서이다. 4.19 혁명 이후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은 정권을 기존 정치인 즉 신민당에게 맡겼다. 하지만 구파와 신파로 나뉘어 갈등을 보이자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생활혁신운동을 전파하게 됐다. 원래 3.15 부정선거에서 나온 각종 선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유권자들을 교화한다는 목적으로 시작한 선거개혁 운동이었지만 생활개혁으로도 이어지면서 국산품 애용 등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많이 발생하면서 후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그 의미가 퇴색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신민당 소장파 의원들이 학생들의 생활혁신운동을 받아들여 청조운동으로 성장시킨 것이다.곱지 않았던 기성 정치인들의 시각
청조운동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면서 가장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사람들은 기성 정치인들이었다. 기성 정치인들은 청조회 멤버들을 ‘위선자’ 혹은 ‘자기 선전을 위한 술책’으로 헐뜯었다. 당시 장면 총리 측근은 ‘고급청주 청조’라면서 청조회를 폄하했다. 하지만 여론은 청조회 편이었다. 사람들은 골덴 양복을 찾기 시작했고, 자동차도 버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전국으로 전파됐다. 결국 윤보선 대통령도 골덴 양복을 입었고, 청조회 멤버들을 청와대에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윤 대통령은 “생활혁명을 위한 입법조치도 연구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견해를 냈다.5.16 쿠데타 계기로
이들의 청조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면서 그야말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기성 정치인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소장파 의원들에 대한 무한 애정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4천374명의 정치인들에게 ‘정치활동정화법(정정법)’으로 정당 활동을 하 지 못하게 됐다. 그러면서 청조회의 청조운동은 흐지부지 됐다. 그러면서 청조회 멤버 중에 일부는 5.16 쿠데타를 지지하면서 공화당에 참여했다. 이에 1963년 1월 14일 종로 다방에서 공식 해체 선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