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2023-12-20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1946년 5월 미군정이 독립운동가와 노동자에게 ‘조선정판사’라는 인쇄소에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누명을 씌운 고문 조작 사건이다. 재판부 역시 판결문을 조작해 유죄로 만든 사실이 입증됐다. 피고인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처형되면서 해방 후 ‘최초 사법살인’으로 불린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미군정 당시의 우리 사회 혼란상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일제가 패망을 하면서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은 불법 조선은행권 인쇄를 남발했다. 이때 근택인쇄소에 명령을 내렸다. 근택빌딩은 치카자와 가문의 인쇄 및 제본, 도서 출판업 등 사설 인쇄소 겸 출판사였다. 그리고 김광수, 박낙종, 송언필 세 사람이 1920년대부터 언론인으로서 신문을 인쇄하기 위해 인수한 건물이다. 일제가 패망을 하면서 조선은행권 인쇄를 남발한 것은 퇴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이에 원래 조선은행권은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를 했는데 이를 감당할 수 없어 사설인쇄소인 근택빌딩까지 동원한 것이다. 그런데 근택빌딩 소속 직원 김창선이 1945년 9월 20일께 일본 기술자들이 철수할 때 백원권 징크판 1개 조를 빼돌렸다. 김창선은 빼돌린 징크판을 집에 보관하다가 낭승구, 낭승헌, 배재룡 등에 2천500원에 팔아 넘겼다. 그리고 이들은 은행권 위조를 공모했다. 인쇄용지와 잉크를 ‘화투를 찍는다’는 명목으로 구입하고 곽재봉이라는 사람의 창고에서 인쇄를 시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배재룡이라는 사람이 범죄 발각을 느껴 롤러를 고의로 깨뜨리면서 범행이 중단됐다. 그리고 김창선은 징크판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보려고 했지만 중부경찰서에서 적발됐는데 뚝섬 위폐 사건이라고 부른다.

미군정 주목

관련자들에 체포되는 과정 속에서 징크판이 김창선에서 나왔다는 점을 미군정은 주목했다. 이에 정판사를 수사토록 지시했다. 뚝섬 위폐 사건 수사와 정판사 직원들을 엮기 시작한 것이다. 정판사 직원들은 독립운동이나 공산주의와는 관련 없던 인쇄공인데 1946년 2월 공산당에 가입했다. 1946년 5월 검거 당시 공산당원이었지만 뚝섬 위폐 사건 당시인 1945년 10월에는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이때 수사를 담당했던 사람이 친일파 고문 기술자 노덕술이었다. 그리고 조선정판사 위페사건이 1946년 5월 15일 공식 미군정 공보관를 통해 공식 발표됐다. 공보과는 “삼백만 원 이상의 위조지폐로써 현 조선일대를 교란하던 지폐위조단 일당이 일망타진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지폐위조단에는 십육 명의 인물이 관련됐는데 조선공산당 간부 2명, 조선장판사에 근무하는 조선공산당원 십사 명”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해방일보를 인쇄하는 조선정판사 소재지 근택빌딩은 조선공산당 본부”라고 위폐 제작 장소를 특정했다. 이어 아직 체포되지 않은 사람에 대해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 이관술 40세와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 45세”라고 이름을 밝혔다. 이후 조선공산당 서울지부 사무실 등이 압수수색됐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공산당과 연결돼 있다는 주장이 이제 기정사실화된 분위기다. 당시 미소공동위원회 협상이 결렬되면서 미군정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높아졌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대대적으로 터지면서 공산당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사실 김창선은 조선공산당을 싫어했고, 박헌영도 싫어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공산당을 엮으면서 대대적인 사건으로 포장됐다.

공산당 활동 불법화

그 이전까지 남한 지역에서 공산당 활동이 합법적이었지만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가 됐다. 이로써 조선공산당은 미군정 탄압과 대중 지지기반이 상실됐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강경 노선을 채택하게 된다. 이에 9월 총파업이 이뤄졌다.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경찰 및 반공단체가 과격하게 진압하면서 사상자가 나오자 대구 시민들이 분노하면서 대구 10.1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