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2월 26일 소련 붕괴

2023-12-26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91년 12월 26일 소련이 붕괴된 날이다. 공산주의를 내걸고 이른바 ‘미소 냉전시대’를 이끌던 소련이 붕괴하면서 국내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경쟁에서 결국 소련이 실패하면서 그에 따라 소련이 붕괴되고 현재 러시아 연방국가가 운영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러시아 연방이 과연 제대로 지속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가 된 상태가 됐다. 소련 붕괴의 촉매제 역할을 우크라이나가 했는데 현재에도 우크라이나가 세계사를 바꾸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 시행

1985년 3월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동구권의 심각한 경제 침체와 체제 한계를 타개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를 시행했다. 그러면서 소련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는 1980년대 소련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 부담, 계획경제의 비효율로 인한 경기침체, 동유럽에서의 민주화 요구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1982년부터 1985년까지 3년 동안 서기장이 3명이나 연속 사망을 하면서 고르바초프에 거는 기대가 상당했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내세웠다. 페레스트로이카는 부패한 관료제 타파, 공산주의 경제의 체제적 한계점을 개선하고 점진적인 시장자유화를 추구하는 정책을 말한다. 여기에 동구권 자유화 요구가 동독으로 번져 나가면서 베를린 장벽이 1989년 무너지면서 소련은 더 이상 소련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는 소련 연방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1991년 소련 존속 투표를 실시했다. 아울러 주권국가연맹 등을 통해 소련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다.
사진=픽사베이

8월 쿠데타

이런 가운데 1991년 8월 19일 소련 부통령이었던 겐나디 야나예프와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KGB 주석이었던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등 소련 정부 내 요직에 있던 8명이 고르바초프가 크림반도에서 휴양 중임을 틈타서 고르바초프를 별장에 감금하고 국가비상사애위원회를 조직해 소련 정부를 장악했다. 하지만 소련인들은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쿠데타 반발 시위가 빗발쳤고, 당시 러시아 SFSR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생방송 기자회견을 통해 쿠데타에 맹렬히 맞설 것을 주문했다. 그러자 주요 공화국 지도자들과 국제사회는 옐친을 지지했다. 이에 쿠데타 세력은 군에게 무력진압을 명령했지만 군 지휘관들은 쿠데타 세력의 명령을 거부했다. 결국 쿠데타 세력은 체포되거나 몇몇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쿠데타가 진압됐다. 고르바초프 정권을 지탱했던 소련 정치인들이 죄다 쿠데타에 동참하면서 쿠데타를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옐친이 전면에 나서게 됐다.
사진=픽사베이

우크라이나 독립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소련은 계속 유지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소련 연방의 가장 큰 구성국인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소련이 쿠데타가 실패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이때 아니면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12월 1일 우크라이나에서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그리고 투표자 중 92%이상(유권자의 85% 이상)이 완전한 독립에 찬성했다. 결국 12월 8일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3국의 지도자들은 벨로베즈스카야 숲에 모여 벨로베즈스카야 조약을 통해 소련의 해체와 독립국가연합(CIS)의 창설을 결의했고, 대세를 막을 수 없게 되자 12월 25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했으며, 다음날 소련 최고회의는 142-N호 선언을 통해 이를 인준했다. 이로써 1922년 12월 30일에 건국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68년 11개월 26일만에 해체됐다.